쓰는 동안, 내가 낳은 글임에도 어쩌면 진짜 주인공은 내가 아닌'엄마'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종종 들었다.그러면서 내 글의, 내 삶의 진짜 주인은 누구였을까란 물음이 늘 나를 따라다녔다.
어쩌다 내 인생은 엄마를 빼곤 설명할 수 없게 되었을까.
엄마의 자살 시도를 여러 번 목격하고막아야했던, 열 살의기억들은 언제쯤 내 무의식을 놓아줄까.
우연과 필연, 어느 쪽일까
재미 삼아 시작된 글이 이렇게까지 장기간 이어 지리라곤꿈에도예상하지 못했다.
신기한건,첫 번째글 발행 후굳이 쓸 소재를 찾지 않아도 내 기억이 부르고,그걸 손이 받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그렇게 매일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땐 스스로도 참신기했고어쩌면 내 치부일, 속 살까지 들춰 보이는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멈출 수 없었다.
학창 시절 따돌림의 경험, 언니의 가출, 엄마의 자살시도, 나의 짧은 학력, 이른 취업으로 얻은 병, 두 번의 산후우울증, 여전히 이어지는 엄마의 방황, 그리고 엄마와의 불안정 애착.이렇듯나열하기만 해도 자극적인키워드들이 한 사람의 얘기라곤 믿기 힘든 사실이란 걸 쓰고야 알았다. 그리고그런자극적인 얘기들을 여전히 나는 쓰고, 또 쓰고 있다.
맞춤법의어느 부분이 틀려먹은 건지 도통 알 수 없었고 촌스럽기 짝이 없는 투박한 실력으로 부끄러움도 잊은 채미친 듯 쓴 것 같다. 사실 맞춤법이 틀릴 거란 걸 알고도 교정하여 발행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노력을 하지 않은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노트북을 켜고 자세를 잡고, 특정시간을 들이면 나는 굳이 그 행동을 지속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 사실 만사가 귀찮았다. 그러니 나는 그저 내 목표만을 위해 쓴 것이다. 그래서1년이 넘도록, 아니 지금 이 글조차휴대폰 하나로쓰고 있다.본업과 부업, 육아와 가사로 바쁜 생활 속에서 시. 공간의 재약까지 따른다면 지속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혹여라도내게 글의 지속비결이라도 물어 온다면, 나는 '대충, 일단 쓰고 봤다.'라고 말하겠다.
처음엔 얼떨결에 썼고, 후엔 왜 계속 쓰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신기하여 반문했던 기억이 있다. 이제와 돌아보니 나는'글'이란 대상을 '나만의대나무숲'으로 생각하고 그저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다신 기회가 없는 사람처럼, 지금이아니라면 들어줄 이가 영영 가버릴 것처럼.혹은 오늘밤이 지나면 헤어질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붙들듯 내 속을 뒤져 침전물이 드러날 때까지 속사포로 랩을하듯 썼다. 어쩌면 그때반은미쳐있었는지도 모른다.지금도 잘 쓰진 못 하지만, 더욱 엉망이었던 글들이 요즘 그 사실을 내게 증명한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여전히우울증 약을 복용 중이었다.약을 꾸준히 복용하고 상담을 주기 적으로 반복해도, 덜 괴롭게 사는 보조역은 해도 완치를 하거나우울의 실체에서 해방되진 못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자주휩싸이곤했을 때였다.미궁에 빠진 느낌이그런 걸까.
초등학교 때부터 오랜 우울증 이력?을 되짚어 보자면,실제로 다 나은 듯하여 방심할 때 오히려 불쑥 찾아와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그리고여전히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거나, 호르몬의 영향을 크게 받는 날엔 스멀스멀 검은 기운이 명치를 뚫고 머리끝까지 장악하여 순식간에 꼭두각시가 되기도 한다.
더럽게 질긴 놈, 우울 생각이 걷는 길
그것은 약삭빠르게 쫓아와
순식간에 숨어들었다.
영악한 그놈은 그림자로 둔갑해
발끝을 맞춰섰고
아둔한 나는
눈치채지 못한 채
자리를 내어줬다.
더 이상 내 몸짓은
그림자를 움직이지 못했고
포로가 된 몸뚱이는
그렇게 꼭두각시가 되었다
심장마저 잃은
꼭두각시가 애원했다.
영혼만은 돌려 달라고.
마지막 힘을 다 해 발버둥 치는 순간
귀 뒤에서 나직하게 속삭인다.
그렇게 쉽게 놓아 줄지 알았더냐고.
-'브런치 북' 짧은 울림의 인기척 중-
아프니까 쓰는 거에요
1년 넘게 꾸준히 쓴 결과약을 복용하고 처음으로 가장 오랜 기간 정신과 약을 중단할 수 있었다. 사실 이런성과를 얻은 지, 채몇 개월이되지 않았기에끊었다기보다줄였다가 맞을것이다. 분명한 건 내 깊은 우울의 뿌리를 조금이라도 흔든 건,의약품이나 상담이 아닌,스스로 쓴 어설픈글들이었다.
그랬다. 왜 계속 쓰고 있지? 라며스스로 반문을 반복했을 때마저답을 찾지 못했거늘최근 확실한 이유 하나를찾게 됐다. 쓰면 쓸수록, 쓰인 활자에 묻은 아픔이내 밖을나갔고,쓸수록 옅어졌으며, 꼭 그만큼 나는 자유로워졌다.미칠 듯 괴로웠던 우울증이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는말했다.
"아프니까 쓰는 거예요. 아픈 사람은 쓰게 되어 있어요."
모두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어렴풋 그 말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아닌가? 누구나 다 그런 것인가? 사실이야 어찌 됐든 그 말은 나를 조금 슬프게 만들기도 했다. '아파서 쓴다'라면 쓰는 사람들은 모두 아픈 것일까.그래서 정말 쓰는 것일까.
어쨌건 나는 쓰면서 정신적인 병증이 많이 호전되었고, 덜 아프며 살아가게 됐다. 그런데아이러니한 건 좋아질수록 한편으론 찝찝하고 게운치 못한 부분이 발생했다는 사실이었다.문제는 이런 내 글을 엄마가 다 보고 있다는 것. 다행히 일방이 아니라 쌍방이긴 하다. 엄마와 나는서로를 쓰고, 서로의 글을보고 있다.
"내가 살자고 엄마를 더 아프게 하는 건 아닐까?
내 글에 묻어간 아픔이 읽는 엄마에게 고스란히 흡수되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은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된 것을 아셨을 때 왜 아이디를 알려줬을까'란 후회를불러왔다.하지만 내가 쓰는 한,혼자만 볼 목적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닌한,분명 비밀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미리 알린 것이 더잘한 일 일지도 모른다.
우린 서로의 글로 알던 사실 외에 모르던 걸 알게 됐고, 서로에 대해 미처 몰랐던 감정도 간접적으로 알게 됐다. 그것이 처음엔 판도라의 상자를 연듯,겁이 나 조심스럽고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 적으로 서롤더 이해하는 징검다리가 되어 주기도 한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엄마 또한 글로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다고 한 사실'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