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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카 Jan 11. 2023

돌아서면 잊는 일상

어제


한동안 바쁘단 핑계로 미뤄둔 일들을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몰아서 처내려고 하니, 몸은 한 결 편해진 것 같지만 마음이 바쁜 건 매한가지다. 이건 그저 내 기분 탓일까?


여러 핑계들로 미뤄 왔던 지인들과의 만남을 주선하여 집으로 초대하고 오랜만에 묵은 얘기들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니, 그란데 왜 모여서 얘기만 했다 하면 시간이 이리도 모자라는 걸까.


분명 잠깐 만나서 커피 한 잔만 하자고 만난 엄마들은 어느새 점심에, 후식으론 2차 커피까지 마셔버렸고, '띵띠링띵띵~'하는 시끄러운 알람 소리는 '고마해라 마이 뭇다아이가' 하며 그만 아이들이나 모셔오라고 우릴 재촉했다. (고마 아랐다. 아랐어. 간다 가.)


아, 상황에서 정말 웃긴 건, 우린 분명 오전 9시에 아이들 등원시키고 바로 만나, 무려 오후 4시까지 이바구를 했는데도 아직까지 자 하고픈 얘기는 반도 못 마쳤다는 사실이다. 우리만 그런가? 매번 헤어질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못다 한 얘기는 조만간 만나서 다시 하자."


띠로리~ 아마 엄마들은.. 몇 날 며칠 합숙을 해도 헤어지는 날 또 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렇게 엄마들과는 곧 하원 때 다시 보기로 하고 배웅을 마쳤다.

아니 그란데.. 우리 집 워디에 쒸쒸티비라도 장착된 것인가? 어디서 보고 계셨던 것인지 '띠리릭' 하며 현관문이 닫히는 정확한 타이밍에 뻘건펜 선생님께 전화가 온다. 내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오늘 오후로 당길 수 있냐는 것이었다. 저녁을 대충 먹기로 마음먹고 선생님과의 약속을 하루 당기기로 했다.


선생님께선 꽤 긴 시간 아이들의 적성 테스트를 진행하고 돌아가시며 검사 결과는 이틀 뒤인 목요일에 보자고 하신다.


"잠시만요.. 이틀 뒤요? 음.. 뭐 있었나? 없었나? 네네.. 될 것 같아요. 그날 보기로 해요~!" 










오늘


신랑은 오늘부터 일주일간 휴가다. 웬일인지 어젯밤 몇 년 만에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보려는 영화는 상영 시간이 꽤 길다 보니 아침 일찍이 서둘러 보지 않으면 아이들 하원 시간을 맞출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아이들을 등원시킨 후 부리나케 출발해 첫 시간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가 끝나고 보니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 빠듯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빠른 배속 걸음으로 다른 층의 회전 초밥집으로 향했다.

밥을 먹는 동안 계획적인 신랑은 며칠 전부터 누누이 얘기했던 나의 생일날 계획들에 대하여 또 얘기하길 시작했다.


"내일 말이야.. 콩순몬 생일 밥도 이 근처에서 먹을 건데.. 내일은 11시에 집에서 나서자."

"응, 벌써 내일이야? 어어.. 알겠어.. 그러자. 좋아 좋아."


집에 도착하자 아이들 하원 시간이 고작 30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내겐 아직 오늘의 스케줄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최근,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첫째 아이 때문에 기본 서류며, 방과 후 서류며, 입학 준비물이며 꼼꼼히 알고 숙지해야 할 사항들과 챙겨서 제출해야 할 서류가 많아서 정신이 더 없었다. 서류 준비 기간도 고작 일주일 밖에 주지 않으니 마음이 바빴다. 암튼 무슨 정신으로 준비했는지 어쨌든 급히 준비된 서류들을 챙겨 아파트 근처에 있는 학교 교무실로 찾아가 서류를 제출했다. 마지막 할 일까지 끝 마치고 나니 아이들 하원 시간이 자로 잰 듯 똑 떨어진다.


"어후~ 오늘 드디어 할 일을 다 한? 뭐 잊은 건 없는겨?"


그런데 그때, 뻘건펜 선생님께 또 전화가 온다..

아, 나랑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요즘 나를 너무 사랑하신다. 며칠 째 전화가 너무 자주 다.. 이느므 인기?푸하하하하하하

전화를 받아 보니.. 어제 잊고 진행하지 못 한 부분을 내일 같이 진행한다고 하신다.


"눼눼~ 알겠요~ 내일 봬여~ 선생니임!!"


전화를 끊고 아이들 저녁을 챙기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솨늘하다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갑자기 느낌이 쎄하다 뭔가 이상한데, 뭐지? 이유 모를 찝찝함이 나를 엄습했다. 뭔가 잊은 것 같은데... 그때 신랑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콩순아~ 내일 11시에 가도록 준비해 놔라~!"

"응. 아랐다니까. 잠깐만 으응? 내일?"

"그으래~ 아까 말했잖아 11시에 내일 출발하기로!!"

"앜~~~!! 맞아 내일 내 생일이지???!!!!!!!!!!!!!!!!"


태어날 때 정신을 엄마 뱃속에 두고 오긴 했지만서도.. 오늘은 참말로 사실정확확인한 날이었다.

정말 황당하다.. 방금까지도 선생님과 내일 2시에 보자며, 그 내용으로 어제, 오늘 몇 번을 통화했는데...

그리고 더 웃긴 건 며칠 전부터 시작해서 어제, 오늘 신랑과도 내일의 약속을 여러 번 확인했다는 것이다.....


 마이 갓김치 악산기슭 곰 발냄새~

이거슨 양다리????

양다리 걸치다 큰일 날 뻔했잖아~~~ 세상에!!!


나는 이 당연한 걸... 오늘 저녁, 방금에야 깨닫고 선생님께 급히 전화를 드렸다.


"네? 어머니 내일 생신이시라고요? 그런데.. 그걸 지금 아셨다고요?"

"네~~ 저 그것도 모르고.. 방금까지도 신랑이랑 약속 잡고, 쌤이랑도 약속 잡았어요.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내일 내 생일이라고 신랑이 그렇게 며칠 전부터 얘기하고 오늘도 얘기했는데.. 그걸 까먹었어요. 푸하하하하하"




독백


그러게 콩순몬

엄마 뱃속에 두고 올 걸 두고 왔어야지.

'정신'을 두고 태어나면 어떡하니!!


아 나도 몰러~ 푸하하하하


어쨌든~저쨌든~잊어서 미안해.

그럼에도, 그런 멍청한 모습의 너도 사랑한다.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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