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바쁘단 핑계로 미뤄둔 일들을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몰아서 처내려고 하니, 몸은 한 결 편해진 것 같지만 마음이 바쁜 건 매한가지다. 이건 그저 내 기분 탓일까?
여러 핑계들로 미뤄 왔던 지인들과의 만남을 주선하여 집으로 초대하고 오랜만에 묵은 얘기들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니, 그란데 왜 모여서 얘기만 했다 하면 시간이 이리도 모자라는 걸까.
분명 잠깐 만나서 커피 한잔만 하자고 만난 엄마들은 어느새 점심에, 후식으론 2차 커피까지 마셔버렸고, '띵띠링띵띵~'하는 시끄러운알람 소리는 '고마해라 마이 뭇다아이가' 하며 그만 아이들이나 모셔오라고 우릴재촉했다. (고마 아랐다. 아랐어. 간다 가.)
아, 이 상황에서 정말 웃긴 건, 우린 분명 오전 9시에 아이들 등원시키고 바로 만나, 무려 오후 4시까지 이바구를 했는데도 아직까지 각자 하고픈 얘기는 반도 못 마쳤다는 사실이다. 우리만 그런가? 매번 헤어질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못다 한 얘기는 조만간 만나서 다시 하자."
띠로리~ 아마 엄마들은.. 몇 날 며칠 합숙을 해도 헤어지는 날 또 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렇게 엄마들과는 곧 하원 때 다시 보기로 하고 배웅을 마쳤다.
아니 그란데.. 우리 집 워디에 쒸쒸티비라도 장착된 것인가? 어디서 보고 계셨던 것인지 '띠리릭' 하며 현관문이 닫히는 정확한 타이밍에 뻘건펜 선생님께 전화가 온다. 내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오늘 오후로 당길 수 있냐는 것이었다. 저녁을 대충 먹기로 마음먹고 선생님과의 약속을 하루 당기기로 했다.
선생님께선 꽤 긴 시간 아이들의 적성 테스트를 진행하고 돌아가시며 검사 결과는 이틀 뒤인 목요일에 보자고 하신다.
"잠시만요.. 이틀 뒤요? 음.. 뭐 있었나? 없었나? 네네.. 될 것 같아요. 그날 보기로 해요~!"
오늘
신랑은 오늘부터 일주일간 휴가다. 웬일인지 어젯밤 몇 년 만에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보려는 영화는 상영 시간이 꽤 길다 보니 아침 일찍이 서둘러 보지 않으면 아이들 하원 시간을 맞출 수 없게 된다. 그래서아이들을 등원시킨 후 부리나케 출발해 첫 시간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가 끝나고 보니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은한 시간 남짓 빠듯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빠른 배속 걸음으로 다른 층의 회전 초밥집으로 향했다.
밥을 먹는 동안 계획적인 신랑은 며칠 전부터 누누이 얘기했던 나의 생일날 계획들에 대하여 또 얘기하길 시작했다.
"내일 말이야.. 콩순몬 생일 밥도 이 근처에서 먹을 건데..내일은 11시에 집에서 나서자."
"응, 벌써 내일이야? 어어.. 알겠어.. 그러자. 좋아 좋아."
집에 도착하자 아이들 하원 시간이 고작 30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내겐 아직 오늘의 스케줄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최근,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첫째 아이때문에 기본 서류며, 방과 후 서류며, 입학 준비물이며 꼼꼼히 알고 숙지해야 할 사항들과 챙겨서 제출해야 할 서류가 많아서 정신이 더 없었다. 서류 준비 기간도 고작 일주일 밖에 주지 않으니 마음이 바빴다. 암튼 무슨 정신으로 준비했는지 어쨌든 급히 준비된 서류들을 챙겨 아파트 근처에 있는 학교 교무실로 찾아가 서류를 제출했다. 마지막 할 일까지 끝 마치고 나니 아이들 하원 시간이 자로 잰 듯 똑 떨어진다.
"어후~ 오늘 드디어 할 일을 다 한겨? 뭐 잊은 건 없는겨?"
그런데 그때, 뻘건펜 선생님께 또 전화가 온다..
아, 나랑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요즘 나를 너무 사랑하신다. 며칠 째 전화가 너무 자주 온다.. 이느므 인기?푸하하하하하하
전화를 받아 보니.. 어제 잊고 진행하지 못 한 부분을 내일 같이 진행한다고 하신다.
"눼눼~ 알겠요~ 내일 봬여~ 선생니임!!"
전화를 끊고 아이들 저녁을 챙기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솨늘하다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갑자기 느낌이 쎄하다 뭔가 이상한데, 뭐지? 이유 모를 찝찝함이 나를 엄습했다. 뭔가 잊은 것 같은데... 그때 신랑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콩순아~ 내일 11시에 가도록 준비해 놔라~!"
"응. 아랐다니까. 잠깐만 으응? 내일?"
"그으래~ 아까 말했잖아 11시에 내일 출발하기로!!"
"앜~~~!! 맞아 내일 내 생일이지???!!!!!!!!!!!!!!!!"
태어날 때 정신을 엄마 뱃속에 두고 오긴했지만서도.. 오늘은 참말로그 사실을 정확히 확인한날이었다.
정말 황당하다.. 방금까지도 선생님과 내일 2시에 보자며, 그 내용으로 어제, 오늘 몇 번을 통화했는데...
그리고 더 웃긴 건 며칠 전부터 시작해서어제, 오늘 신랑과도 내일의 약속을 여러 번 확인했다는 것이다.....
오마이갓김치 악산기슭 곰발냄새~
이거슨 양다리????
양다리 걸치다 큰일 날 뻔했잖아~~~ 세상에!!!
나는 이 당연한 걸... 오늘 저녁, 방금에야 깨닫고 선생님께 급히 전화를 드렸다.
"네? 어머니 내일 생신이시라고요? 그런데.. 그걸 지금 아셨다고요?"
"네~~ 저 그것도 모르고.. 방금까지도 신랑이랑 약속 잡고, 쌤이랑도 약속 잡았어요.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내일 내 생일이라고 신랑이 그렇게 며칠 전부터 얘기하고 오늘도 얘기했는데.. 그걸 까먹었어요. 푸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