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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카 Jan 10. 2023

그 칭찬은 내 것이 아닌데요

번지수가 틀렸다


뜻밖의 선물




한 달 전, 아버님 생신날이었다.


우리는 편도 2시간을 달려 시댁에 도착했다. 벌써 시집온 지 7년이 다 되었지만 나는 시부모님 생신 상을 단 한 번도 직접 차려드린 적이 없었다. 꼭 그래야 한다는 법이 어디에 쓰인 것도 아니지만 생신 날이 다가오면 사실은 해 내지 못 한 숙제처럼 괜히  마음을 괴롭히곤 .


직접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드리지 못하는 대신 우리 부부는 고향 갈비골목의 한 가게로 어른들을 모셨다. 팔순이 넘으신 시할머님과, 아직 결혼하지 않으신 고모님,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우리 네 식구까지 화기 애애한 분위기에 고기를 구워 먹고, 명절 때도 보기 힘든 술까지 나누며 칭찬과 덕담이 오고 갔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술을 잘하지 못하는 나와 이이들에겐 음료를 붓고, 다 같이 짠~  하며 잔을 마주치며 웃던 그 순간 우리 부부가 참 열심히 살았구나, 우리 가족들 지금 이대로 행복하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살짝 뭉클했다. 찰나의 순간 훑어본 가족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이심전심이다.




"미혜야. 고모가 옷 하나 사줄게 오빠 도 살 겸. 같이 가자."

"아.. 저는 괜찮아요. 아버지 것만 사주세요."

"아니야. 우리 미혜 시집오고 내가 특별히 해준 게 없어서  늘 마음 쓰였어."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아이들 올 때마다, 옷이며 용돈이며 그게 다 저한테 해주신 것이나 다름없는걸요."



기어코 사주시겠다는 성의를 끝까지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아이들과 할머님, 어머님은 먼저 집에 가 계시고, 나와 신랑, 아버님은 고모님을 따라 나서 겨울 패딩을 하나씩 선물 받았다.


위로 둘 있는 언니들에게 작아진 패딩을 몇 개나 받은 통에 몇 년째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패딩을 입지 못했었는데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외투를 선물 받고 보, 감사한 한편 기분이 좀 묘했다. 요즘은 패딩이 이렇게 가볍고 예쁘게 잘 나온다니, 나도 어지간히 스스로에게 박하게 는구나 싶어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내겐
과분한 칭찬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동그란 나무상을 펼치고 둘러앉아 생일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의 불도 함께 다. 어느새 양껏 술이 된 어른들의 기분은 조금 업 됐다.



"미혜가 시집와서 시부모님, 할머니께 잘하고, 아이들도 잘 키우고, 신랑까지  보필하니 아주 복덩이야. 고모는 너무 고마워."

"아니에요. 제가 뭐 한 게 없는데요. 다 어른들이 잘해주시고 아껴주신 덕분이죠."



고모님의 칭찬을 시작으로 아버님, 할머님까지 했던 얘길 또 반복하시며 삼 십분 가까이 칭찬이 이어지는데,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이게 아닌데.. 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골랐어. 잘하긴  좀 잘하지."



평소 같으면 웃고 말 신랑도 그날따라 신이 나 거들었다. 넘치는 칭찬을 받으며 시선은 자꾸만 어머님께 향했다.


한 마디씩 간단한 칭찬이 오고 끝이 났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이미 고깃집에서 1차로 엄청난 칭찬들을 해주시고 또다시 집에서 삼십 분 정도 2차로 칭찬을 이어가시니 나는 정말 몸 둘 바를 몰랐다.




톡 까놓고 얘기해서 내가 무안했던 이유는, 사실 정말로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은 바로 옆에 계신 어머니 셨기 때문이다.  시집오고 몇십 년동안 시부모님을 모시며 맏며느리로서의 도리를 충실히 하셨으며, 입 무겁고 손까지 야무져서 음식 솜씨 또한 좋으신 어머니. 그래서 항상 시댁에 가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맛있고 다양한 음식들을 나는 맛볼 수 있었다.


어머님의 시집살이가 어땠을지, 할아버지를 모신단 이유로 집안 대소사를 도맡아 하신 우리 친정엄마의 삶을 연상하모를래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처음부터 나는  시어머니께 정이 많이 갔다.


고부사이가 그렇게 어렵고 힘들다던데, 엄마를 통해 본 세월이 고스란히 어머니께 덧 입혀지며 내 엄마처럼 생각하고 모시싶단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댁살이에 무뚝뚝한 경상도 남편과 살가운 딸 하나 없이 외동아들을 둔 어머니께 아들덕에 얻은 살가운 딸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다행히 합리적인 성격인 어머니와 나는 정말 합이 잘 맞았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연락을 하고, 시댁에선 신랑 없이 어머니와 잘 다닌다. 어떨 땐 정말 신랑이 사위 같고, 내가 딸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할 정도다.


나이가 한 살씩  늘수록 집안 어른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낀다. 감사한 마음을 전할 때마다, 아직까진 힘이 있으니 해주신다며 여전히 다 큰 자식의 보호자역을 자처하고 든든히 우리 가족의 배경이 되어 주시려는 어머니께 감사하다.


내가 잘하려 노력한 것도 맞지만, 인간관계란 것이 쌍방이 아니라면 가능하지 않다는  잘 알지 않은가. 특히 고부사이는 한 사람만 진심을 몰라줘도 더 쉽게 틀어지 어른인 어머니께서 부족한 나를 보듬고 잘 끌어주신 덕이 크단 걸 나는 알고 있다.






"처음부터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적당히 안 힘들 만큼 하되 꾸준한 것이 차라리 나아. 사람들은 아무리 잘해도 계속 잘하면 으레 당연한 것으로 알고, 열 번 잘하다가 한 번만 잘못하면 잘한 건 온데간데없거든."



처음 시집왔을 때 어머님이 해주신 말씀이었다. 엄마의 삶을 보고 자랐기에 어머니께서 어떤 마음으로 전하시는 말씀인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가이드라인을 잘 잡아주셨기에 나는 내 재량 이상으로 오버한 적 없이 잔잔하고 꾸준한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칭찬의 번지수



가끔, 아니 종종 친정엄마, 그리고 시어머님을 면 어떤 부분에서 나는 참 시대를 잘 타고났구나란 생각을 하곤 한다. 부모님께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참 칭찬받기 쉬운 세상에 태어난 것 같기 때문이다.


시댁에 갔을 땐 늘 상차림만 잠시 돕고, 설거지마저 하지 못하아껴주시니 그저 삐약이 둘만 보고 있으면 됐다. 그러니 차려주시는 따신  먹고, 푹 쉬다와도 그저 전화만 자주 하고, 종종 찾아뵙는 그 하나로 이리 예쁨 받고 칭찬을 받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쌍방일 때 가능한 것이며 내가 복이 많은 것인 걸 잘 안다.



이렇게 칭찬을 받을 때면, 우리 엄마, 어머니 세대는 참 헌신하신 삶에 비해 돌아오는 칭찬이 너무 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칭찬은 고사하고, 탓만 돌아오기 일쑤였으니 어찌 한이 되어 마음의 병이 남지 않겠는가.




그날도 그랬다.


이미 몇십 년을 모신 시어머니, 여적 시집도 가지 않고 아들 며느리가 올 때마다 함께하는 시누이,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것 같을 아들. 며느리가 삐약이 같은 새끼 둘까지 달고 왔으니, 우리 네 가족이 갈 때마다 어머니는 다시 예전처럼 대가족 밥을 지어 먹이고, 그 많은 뒤치다꺼리를 하신다.

 

그날 내가 한 것은 고작 아버님 생신이라고 찾아가 고기를 사드린 것 밖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진짜 일 같은 일은 조용히 어머님이 다 하시고 칭찬은 내가 받고 있었으니.. 난 참 어머니 앞에서 송구한 마음과, 한편으론 같은 여자로서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니 그날, 

그 과분한 칭찬들은 주인을 잘 못 찾은 게 아니었을까.




지금이라도

티 안나는 수고로 묵묵히 헌신하고 계시는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께

더 많은 칭찬들제 주인을 아갔으면 좋겠다.




"어머니, 진정으로 칭찬받아 마땅한 분은 바로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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