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에 곁들여지는 것

by 윤슬


욕이 곁들여진 커피 한 잔



결혼 후, 신랑의 직장을 따라 연고도 없는 지역에 신혼집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니 벌써 이곳에 거주한 지도 칠 년이 다 되었네요. 이렇게 뒤돌아 보니 세월이 정말 무심히도 빠르다는 걸 실감합니다.


세월만큼, 벌써 아는 얼굴, 아는 지인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대부분이 아이를 매개로 알게 된 엄마들이었습니다. 첫째 아이가 네 살, 어린이집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아이 친구의 엄마들과 가까이 지내며 만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관계가 가까워지기 전까진 나름 육아나 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보공유도 하며 삶의 활력이 되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이가 많이 가까워지자 필요 이상의 이야기들이 오갔고 모임을 하고 나면 이상하게 피로도가 늘어 저를 지치게 했습니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만나서 나누는 대화엔 신랑 욕, 시댁 욕, 자기 자랑 등이 곁들여졌습니다. 대부분은 그런 식의 대화로 웃고 스트레스를 푸는 동안 오히려 저는 스트레스를 얻어 왔습니다. 대화에 낄 수도, 욕할 일도 없지만 누워서 침 뱉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 싫은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스레 그런 시간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안일과 부업일을 병행하면서 바쁜 시간을 쪼개어 내는 시간인 만큼 제게는 허투루 쓰기 싫은 소중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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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가 곁들여진 커피 한 잔



요 며칠 마음이 심란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럴 때면 제가

부로 찾는 곳이 있습니다. 아파트 안 24시 마트입니다. 마트 사장님과는 아파트 입주 때부터 알게 되어 이제는 절친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녀가 40대 후반이라 30대 후반인 저와 숫자상으론 친구가 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니 그것이 참 좋더랍니다. 마음과 철학만 통한다면 남녀노소, 나이불문 누구든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구린 하늘만큼이나 마음도 구렸던 오늘 아침, 괜히 또 떨어진 커피를 핑계 삼아 마트에 들렸습니다.


"안녕하세요오~~~!!"

"엽이 엄마 왔나~. 하하하하하하하 "


어김없이 경쾌한 웃음으로 저를 맞아주시는 사장님. 커피를 사가는 손님에게 굳이 커피 한 잔 마시고 가라며 저를 잡습니다.


"사장님~수고하세요옹~"

"왜? 그냥 가려고. 커피 한 잔 하고 가라. 바쁘나?"

"안 바빠요. 네. 좋아요. 맨날 이렇게 공짜로 퍼주면 남는 거 있습니까. 사장님. 좀 아껴요. 아껴. 하하하하하."

"야. 내가 니한테 믹스 커피 한잔도 공짜로 못주는 사람이라면 돈 많이 벌어서 뭐가 행복하겠노. 그리고 돈이 사람을 부르는 게 아니라. 마음이 사람을 부르는 거다. 그러니 니가 사러 오고, 또 내 보러 온 김에 뭐하나 더 사가는 거 아니가?"

"역시 지당하신 말씀이세요. 하하하하하하하."


마음을 꼬드겨 찾아오게 만들 줄 아는 따뜻하고 지혜로운 친구는 갈 때마다 믹스 커피 한 잔에 당신이 겪은 삶의 실패나 후회들을 곁들여 살아가는 지혜를 일깨워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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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게 질긴놈 - 우울


-미혜-



그것은 약삭빠르게 쫓아와

순식간에 숨어들었다.

영악한 그놈은 그림자로 둔갑해

발끝을 맞춰섰고

아둔한 나는 눈치채지 못한 채

자리를 내어줬다.


더 이상 내 몸짓은

그림자를 움직이지 못했고

포로가 된 몸뚱이는

그렇게 꼭두각시가 되었다.


심장마저 잃은 꼭두각시가 애원했다.

영혼만은 돌려 달라고.


마지막 힘을 다해 발버둥 치는 순간

귀 뒤에서 나직하게 속삭인다.

그렇게 쉽게 놓아 줄지 알았더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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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타는 커피 한 잔

아무개를 위한..



지난 주말 생일을 맞아 축하 파티를 했던 엄마가 어젯밤 또 가출을 했습니다. 오늘이 그녀의 진정한 생일날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아무렇지 않게 절친에게서 사온 커피와 손수 쑥을 뜯어 만든 엄마의 쑥떡을 먹습니다. 마음이 구린데 커피도 쑥떡도 맛있습니다.


예전엔 무작정 걱정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잘 먹지도, 웃지도 않았습니다. 다 아픈데 나만 잘 지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에게 가혹한 벌을 줬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잘 먹어도 되고, 크게 웃어도 된다고 내게 말해줍니다.


그럼에도 네가 젤 소중하다고. 너는 내게서 너를 지키라고.


삶이란, 수 없는 또 다른 나를 만나가는 여정이며, 수 없는 실패와 후회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장님이 들려주시는 실패와 후회의 얘기가 참 좋습니다. 앞선 사람이 멀찌감치 떨어져 뒤 따르는 이에게 허술한 돌다리를 알려주는 그 마음이 참 좋습니다. 덕분에 저는 두려움을 버리고 더 많이 실패하고 더 많이 후회하려는 용기를 얻습니다. 결국 많은 실패와 많은 후회는, 더 많은 경험과 더 많은 도전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랍니다.

훗날, 나의 실패와 후회들을 언젠가는 따뜻한 커피 한 잔에 곁들여 아무개의 내 젊은 친구에게도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되길.






이미지출처. 블로그 라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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