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생존기
이 글은 직장생활의 애환을 겪는 많은 독자분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드리는 글이 아닌, 스스로 겪고 있는 지옥 같은 직장생활에 대한 자그마한 위로이자, 그들과는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그들의 만행을 잊지 않겠다는 타산지석의 사료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은 모두 허구입니다)
20년 1월 2일 (시무식 이후, 엄CEO 접견실)
"대표님, 대표님의 기대가 큰 유통사업부의 사업 방향성에 대해 곧 업무보고드리겠습니다."
"조 상무, 연말에야 한국에 들어왔고, 아직 사업부 파악도 안 되었을 텐데 천천히 해도 됩니다."
"대표님이 의사 결정해주신 신사업인데, 이미 연말부터 구성원들과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단 2주만 주시면 유통사업부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실행과제들에 대해 꼼꼼하게 준비하여 업무보고드리겠습니다."
"허허.. 사람 참, 그렇게 급한 거 아니라니까. 그렇게 조 상무가 호언장담하니, 그래 어떤 멋진 청사진을 그려올지 기대 한번 해보겠습니다."
시무식 이후, 조 상무는 공식적으로 사업부원들을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큰 선물을 전했다. 1월 15일, 정확히 2주 뒤에 대표님 업무보고 일정을 잡아왔다. 창가 옆 팀장 자리가 생긴 것에 흡족해하며 하나하나 짐 정리 중인 기획팀장도 본인들 짐 박스를 찾느라 정신없는 사업부원들도 모두들 새해 첫날 오전부터 업무보고 관련 회의에 소집되었다.
"자, 1월 2일 새해 첫날이니 제가 여러분들에게 해줘야 할 일은 여러분들의 머리를 맑게 해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구성원들의 머리가 맑아질까요.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하고, 그 정의에 따라 구체적이고 꼼꼼한 실행과제들을 만들어 내어, 즉시 실행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2주 동안 그 작업을 할 예정입니다. 1월 15일 우리는 새롭게 출범한 유통사업부라는 커다란 배의 출항을 알리는 출정식을 대대적으로 할 겁니다. 그 자리에는 대표님을 포함, 모든 경영진을 모시고 우리가 나아갈 방향성에 대해 선포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실행해 나갈 것인지 구체적인 실행 계획들을 들려드릴 생각입니다. 여러분들과 함께라면, 2주 동안 충분히 준비 가능하리라 봅니다.
기획팀장은 향후 일정에 맞춰 어떻게 보고 준비를 할 것인지, 나에게 별도로 얘기해주세요. 자, 새해 첫날이고 하니 다 같이 곰탕 한 그릇 먹으러 갑시다."
새해 첫 출근날, 오전부터 대표님 업무보고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구성원들은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채 곰탕집에 끌려왔다. 먹는 둥 마는 둥하는 구성원들은 아랑곳없이 조 상무는 본인이 꿈꾸는 1월 15일 업무보고의 멋진 모습을 또다시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날 이후, 한동안 곰탕집은 안 갔던 것 같다.
20년 1월 4일 오전 9시 (조 상무 방 회의실)
유통사업부 기획팀은 출근과 동시에 조상무 방으로 호출되었다. 15일 업무보고를 위한 준비계획을 들려달라는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팀장은 아직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시무식 이후, 자리 정리하고 다른 팀에 인사 다니고, 조 상무 술자리에 동석한 것 외엔 특별히 한일이 없었고 그러니 당연히 계획 또한 없었다.
"여러분도 다 계획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첫 업무보고이고 새로 꾸려진 팀이라 아직 손발도 안 맞을 테니 제가 참고할만한 자료를 드리겠습니다. 15일 업무보고는 지금 드리는 자료 기준으로 작성해주세요.
추가적으로 필요한 자료들은 상품기획팀, 유통지원팀 등을 통해 보완하시고 메인 작업은 기획팀에서 맡아 작성하세요. 그리고 초안은 5일 뒤, 보고 받겠습니다. 어디 우리 기획팀 실력 한번 봅시다."
조 상무는 본인이 북미법인 시절 작성했다는 200Page에 달하는 '북미지역 유통 개선 방안 - 100대 실행과제를 중심으로'라는 장황한 제목의 보고서를 건네줬다. 이걸 기본으로 작성하라니, 시작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그리고 이 팀장은 시작부터 본인이 날로 먹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임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유 차장, 상무님 주신 보고서 참고해서 팀원들이랑 초안 작성해봐. 난 오늘 상무님 모시고 외부 일정 있으니까 거기서 바로 퇴근한다. 중간중간 작업된 결과물 있으면 메일로 보내주고, 고생해라."
그렇게 우린 남겨졌고, 주어진 5일 동안 악전고투했다. 유 차장님의 지휘 아래, 나머지 팀원 3명이서 열심히 PPT 공장장처럼 일했지만, 약 100Page 넘는 분량을 작성한 뒤로는 생각도 멈췄고, 손도 멈췄다. 그렇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남은 시간을 보냈다.
20년 1월 9일 오전 10시 (다시 조 상무 방 회의실)
"다음, 다음, 다음 페이지 넘어가 보세요. 아니 이 사람들아, 판을 벌일 줄 만 알지, 수습을 전혀 못하잖아! 지금 이 많은걸 나보고 대표님 앞에서 미주알고주알 읽으란 말입니까? 이 팀장 어디 한번 읽어 보세요. 이걸 1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나 한번 봅시다."
"아닙니다, 사업부장님. 참고로 주신 200Page 분량 북미법인 유통 개선 방안 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한 초안인데, 저희 팀원들이 아직 부족한 면이 많아 대표님 업무 보고할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수정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15Page입니다. 1시간에 15Page 정도면 숨 가쁘게 발표해야 합니다. 나머진 전부다 유첨으로 돌리세요. 그리고 82대 과제가 뭡니까? 숫자는 홀수가 아니면 100을 맞추세요. 100대 실행과제가 괜히 나온 줄 압니까? 다 숫자를 보는 눈이 있어 맞춘 것이니, 실행과제는 100개까지 늘리세요. 내일 오전 10시 이 자리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나가보세요!"
5일 동안 철야를 통해 작성한 140Page에 달했던 보고서는 난도질을 당해 20Page 수준으로 남겨졌고, 나머지 120Page는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울컥하는 억울함과 분노도 잠시,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당장 내일 오전 재보고를 위한 보고서 작업에 들어갔다. 조 상무는 오늘도 어김없이 5시가 되자, 이 팀장과 술을 먹으러 사라졌다.
"일찍 일찍들 들어가세요. 일 못하는 사람들이나 야근하는 겁니다. 전 일 잘하니 일찍 술 먹으러 갑니다. 다들 내일 봐요."
"유 차장, 나 상무님 모시고 먼저 나갈 테니 내일 보고 준비 잘 부탁한다. 자료 다되면 밤늦게도 좋으니 메일 보내고 카톡 하나만 줘. 내일 보자."
『사업부장 - 기획팀장 세트』는 그렇게 5시면 조기퇴근으로 사라졌고, 우린 또다시 야근을 했다. 그리고 밤 11시가 다되어 이 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받을까 말까 한참 고민하던 유 차장님은 결국 두 번째 걸려 온 전화를 마지못해 받았다. 하지만, 그날 그 전화는 받지 말았어야 했다.
이미지 출처:Photo by Hermes River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