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생존기
이 글은 직장생활의 애환을 겪는 많은 독자분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드리는 글이 아닌, 스스로 겪고 있는 지옥 같은 직장생활에 대한 자그마한 위로이자, 그들과는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그들의 만행을 잊지 않겠다는 타산지석의 사료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은 모두 허구입니다)
12월의 마지막 주, 종무식 당일 (19년 12월 24일)
여느 해처럼 종무식을 앞두고 TFT룸의 구성원들은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연말까지 약 일주일의 연휴를 맘 편히 보내려면 한주 동안의 일을 미리 쳐내야 했고, 사업부 발령으로 인해 사무실 이동을 하기 위한 짐도 꾸려야 했다. 좁디좁은 TFT룸을 떠나는 건 다들 반색했지만, 그간 6개월 동안 쌓인 사무용품들과 개인 짐을 정리하는 것은 또 다른 귀찮음의 문제였다.
"백 과장, 웬만한 물품은 그냥 버려. 사업부로 가도 공간 얼마 안 될 텐데, 그 짐을 다 가져갈 거야?
난 우리 팀원들 자리가 지저분한 꼴 못 본다. 참고해라."
1월 1일 자 발령임에도 이미 이일도 부장은 기획팀장 노릇을 일주일 선행해서 수행하고 있었다. 이사 갈 공간에 대한 파악, 그곳에 들어갈 구성원들의 수, 대충 계산해봐도 TFT룸 보다 공간이 그리 넉넉해 보이진 않았다. 팀장 좌석이 확보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총무팀 전화에 오전부터 총무팀을 찾아가 한바탕 드잡이질을 하고는 당당히 팀장 자리를 확보하고 돌아온 그였다. 덕분에 파티션을 몇 개 제거해야 하고 팀원들의 사무공간은 더 좁아질게 분명했지만, 그에겐 팀장 자리와 그 공간의 크기가 더 중요한 듯했다.
"차 과장, 너 유 차장 잘 알지? 기존 사업부에서는 에이스 소리 들었을지 모르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 오면 열심히 하라고 해라. 오늘 이사하는 날이면 와서 짐도 좀 나르고 도와야 하는 거 아니야? 여기선 보여준 게 없으니 난 백지상태로 대할 거야. 꼭 전해라, 여기와서 열심히 해서 인정받으라고."
플라스틱 부품 제조사업부의 유일한 차장을 팀원으로 스카우트하기 위해 개인 면담 자리며, 술자리에서는 간이고 쓸개고 빼줄 것처럼 하던 그였다. 그러나 인사발령문이 뜨고 하루가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이 부장은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그 자리 시작부터 요란하다 싶었지만, 원래 그랬던 사람을 자리가 드러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얼핏 스쳐갔다.
퇴근 시간을 앞둔 늦은 오후
퇴근 시간이 얼마 안 남았지만 TFT룸은 업무 보는 사람 반, 이사하는 사람 반이 뒤섞여 아수라장이었다. 그리고 정신없는 와중에 '그'가 처음으로 찾아왔다.
"똑똑, 여기가 유통사업부 TFT룸이 맞나요?"
정장을 차려입은 처음 보는 덩치 큰 아저씨가 문 앞에서 여기가 어딘지 물었다. 누군지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이사하랴, 업무 보랴 정신없는 와중에 이 부장이 달려 나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 네네. 보시다시피 맞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 중이라 좀 정신이 없네요. 누구 찾아오셨나요?"
"아 제가 잘 찾아온 모양이네요. 반갑습니다. 앞으로 유통사업부에서 함께하게 된 피터 조 상무입니다"
덩치에 맞게 목소리도 큰 편이라, 박스 테이프를 뜯고 있던 몇몇을 제외하곤 그가 새로 온 사업부장임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오늘 온다는 얘긴 없었는데' 다들 당황스러운 상황에 할 수 있는 거라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반기는 게 최선이었다.
"아.. 하하하, 상무님. 오신다고 미리 기별이라도 주셨으면 이렇게 난장판인 모습을 보여드리진 않았을 텐데, 여기 대부분이 상무님을 모실 사업 부원들입니다. 자자, 다들 인사드리라고."
"(일동)아, 안녕하세요, 상무님. 처음 뵙겠습니다. 하.. 하하.."
이 부장의 순발력 있는 대응에 다들 어색한 인사와 함께 애써 웃음을 지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하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짓는 TFT룸 내 구성원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조 상무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들 표정이 밝네요? 신사업한다는 분들 표정이 밝아서 참 좋습니다. 표정도 밝고 하니, 새로운 시작을 빨리 해봅시다. 정식 인사는 그때 가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자, 어서 일들 보세요."
표정이 밝다라...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기에 무언가 싸한 느낌이 들었지만 조 상무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이 부장의 배웅을 받으며 엘리베이터홀로 빠르게 사라졌다. 퇴근 본능은 지지부진하던 이삿짐 정리도 남은 잔무도 빠르게 처리하는 효험을 발휘했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자, 새해인사 겸 내년에 잘해보자는 인사를 하며 하나둘 퇴근하기 시작했다. 내년부터 시작될 새로운 사업부에서의 커리어에 각자 기대를 담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렇게 우린 내년에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19년 12월 26일 오전 10시 (이천 물류센터 대회의실, 종무식 연휴 첫날)
내년에 만나기로 한 TFT룸 구성원, 새롭게 사업부로 합류할 인원 등 도합 40여 명은 지금 무슨 영문인지 이천 물류센터 대회의실에 모여있었다. 내년에 잘해보자라는 인사를 하고 헤어진 뒤 정확히 1일 하고 17시간 만에 우리는 재회했다. 이런, 불쾌한 재회라니... 대부분의 구성원은 황당함, 불쾌함,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10여 분 지나, 우리를 소집한 새로운 사업부장이 이 부장과 함께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일하게 된 피터 조 상무입니다. 원래는 다음 주부터 본사 출근이지만 여러분들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 이렇게 오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여러분들의 밝은 표정을 보니 빨리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은 간단히 제 소개와 여기 계신 구성원분들이 각자 돌아가며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인 업무는 내일부터 시작합시다. 연휴라 본사 출근이 안될 테니 연휴기간 동안 우리 사이트는 이곳 물류센터로 합니다.
첫날이고 하니 인사가 끝나고 나면, 근처 백숙집에서 간단히 막걸리와 닭백숙을 먹겠습니다.
자, 그럼 저부터 소개하겠습니다..."
12월 26일 ~ 12월 31일은 회사 공식 휴무였다. 무보수엔 무노동이라 그랬던 거 같은데, 약 40여 명으로 늘어난 비자발적 노예들은 그렇게 6일간 물류센터에서 피터 조 상무와 동고동락을 했다. 그의 표정은 밝아졌고, 구성원들은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 2019년. 그건 예고편도 아닌 그저 6일짜리 티저에 불과했다. 그리고 2020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