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내로남불, 모든 보고의 부족함은 너희들 탓.

(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생존기

by 흔들의자
이 글은 직장생활의 애환을 겪는 많은 독자분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드리는 글이 아닌, 스스로 겪고 있는 지옥 같은 직장생활에 대한 자그마한 위로이자, 그들과는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그들의 만행을 잊지 않겠다는 타산지석의 사료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은 모두 허구입니다)


유난히 무대 체질인 사람들이 있다. 10을 준비했어도 무대에만 서면 100을 준비한 것처럼 신들린 듯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는 부류가 있다. 그 또한 그런 능력을 가진 부류 중 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땐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최소한 '우리가 공들여 쓴 보고서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진 않겠구나'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가 쓰디쓴 배신감으로 돌아오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월 15일 오전 10시 (회사 내 대회의실)

첫 업무보고를 시작하는 조 상무는 엄 대표 포함 경영진들 앞에서 거침없이 본인의 생각을 피력해 나갔다. 다른 경영진들이 듣기엔 다소 공격적이고 무례해 보일 수도 있는 내용들이었으나, 자신감 있고 위트 있는 표현들을 섞어가며 적절하게 선을 넘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왜 B2C 유통사업을 해야 할까요? 여기 계신 대표님 포함 모든 경영진 분들은 사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지난 세월 우리가 해온 사업은 어찌 보면 편하고 손쉬운 사업모델이었습니다. 대형 거래선을 뚫고 안정적인 가격으로 다년간의 납품을 통해 지속 성장해왔지만, 이제 시장환경은 악화일로입니다.

우리가 믿어왔던 대형 거래선들은 거래처를 다변화하기 시작했고, 시장에 경쟁자들은 계속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여전히 많은 물량을 확보하고자 영업부문에서 고군분투 중이지만, 결국 가격으로 Market Share를 사 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떨어진 가격에도 이익을 내기 위해 각 제조부문에서는 피나는 원가절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신규 채용을 줄이고, 필요한 투자를 뒤로 미루는 등 회사의 체질이 점차 약해지는 건 그간 우리가 편한 사업을 익숙한 방식으로 해 온 대가이기도 합니다.

경쟁사들은 어떠할까요? 더 이상 대형 거래선에 얽매이지 않고, 일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발 빠르게 유통망을 확충하고, B2C 사업을 전개한 L사, H사 등은 이제 시장 내 독보적인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B2C 사업 어렵습니다. 힘든 게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할 길이고, 그동안 우리가 외면했던 길이기도 합니다. 이제 대표님이 주신 기회를 활용해 여기 계신 경영진 분들이 물심양면 도와주신다면 우린 그 힘든 길도 빠르게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전 그렇게 할 자신이 있고, 우리 회사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그 길을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해 출사표를 던지는 각오를 담아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 사업부의 지향점은......"

다소 도발적인 첫 시작이었지만, 조 상무의 한방은 대표님 포함 경영진들에게 먹혔고 그의 첫 업무보고는 거침없었다. 디테일하고 기술적인 내용들은 적당히 티 나지 않게 넘어갔고, 준비한 것들을 대부분 선보이며 보고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첫 보고는 그의 의도대로 성황리에 마치는 분위기였다.


"조 상무, 지금까지 내용이면 조 상무의 B2C 유통사업에 대한 열의와 확신에 의심을 표하는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을 겁니다. 뒤에 디테일한 내용은 따로 나에게 얘기해주는 걸로 하고, 궁금한 게 하나 있어 그걸 먼저 묻고 싶습니다.

1년 내 지금보다 전국 유통망을 3배 가까이 확장하는 것을 실행과제로 잡았는데, 전 그렇게까지 빠르게 확장하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짧은 시간 내 숫자적인 분석까진 어려웠겠지만 개별 유통들을 단단히 다져가면서 확대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처음부터 너무 일을 벌여 놓으면 우리가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이 있을까 우려가 되기도 하는데 조 상무 생각은 어떤가요?"

발표 막바지에 엄 대표는 보고 내용을 잘 들었다며, 본인이 궁금해하던 질문으로 보고의 피날레를 대신했다. 조 상무는 갑자기 들어온 엄 대표의 질문에도 당황한 기색 없이 대답을 이어갔다.


"대표님이 우려하시는 부분 저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 구성원들이 부족한 부분이 많아 숫자적인 측면에서 확신을 드릴 수 있는 수준으로 자료를 완성하진 못했지만, 후속 보고에는 좀 더 단단히 해서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자료에 말씀드린 권역별 유통 확대 방안도 제가 그리는 지향점에는 한참 부족한 수준이라 이 또한 제가 좀 더 날을 세워 다음 보고에 상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전체적인 사업의 추진 방향성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한 자리였습니다. 새롭게 세팅된 사업부이다 보니, 전체적으로 아직은 저와 손발을 맞추는 스태프들이 날을 세우는 역량이 부족하지만, 이 또한 제가 잘 이끌어가겠습니다. 대표님께서 뽑아주신 좋은 자원들이니 이들을 육성하는 것 또한 제 몫이라 생각하고 훌륭한 스태프로 잘 키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엄 대표의 질문에 조 상무는 손발을 맞추는 스태프의 역량이 아직 부족해서 잘 육성해보겠다는 동문서답으로 대답했으나, 누구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이미 대표님은 보고 내용에 흡족한 표정이었고, 다른 경영진 중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토를 달고 싶어 하지 않았다.


"조 상무, 발표 내용에 있어 흠결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반대 방향에서도 한번 고민해봐 달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공격적인 유통 확대를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이 있는지 의문이 있습니다. 빠르게 늘리는 게 맞을지, 천천히 내실을 다져가며 확장하는 게 맞을지 한번 더 고민해달라는 의견입니다. 이에 대해 전 아직 답을 못 내리겠습니다. 그 답을 조 상무가 내주었으면 합니다."

"다음 보고에는 대표님이 명쾌하게 결정 내리실 수 있도록 제가 그 답을 들고 오겠습니다."

"오늘의 업무보고는 전체적으로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2주 남짓한 시간 동안 이 정도까지 해올 거라고는 사실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북미법인 시절 했던 유통개선 보고 못지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해보겠습니다. 다른 분들 질문 있으시면 하시고, 없으면 다 같이 점심으로 곰탕이나 한 그릇 먹으러 갑시다."

엄 대표와 조 상무의 간단한 질의응답이 끝난 후, 대표님 포함 대부분의 경영진은 곰탕 한 그릇을 먹으러 사라졌다. 보고는 잘 끝난 거 같은데 무언가 무시, 모욕당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부족해서 준비를 못한 것인지, 시킨 사람의 역량이 부족해서 못 채운 것인지 선후관계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지만 '아무렴 어때'하며 오늘은 그저 빨리 쉬고 싶었다.


큰 보고가 끝났으니 '그래도 한동안은 좀 수월하겠지'란 기대로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한 다음날, 그 기대는 점심시간부터 가차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Memo #1》

그가 소시오패스임을 인지하기 전에는 그저 지랄 맞지만, 업무역량은 갖춘 리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갔었다. 첫 업무보고 시에도 좌중을 사로잡는 언변, 소신 있는 발언 등 흔히 우리가 선망하는 '할 말은 하는 리더의 모습'도 일면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착각했다.


그러나 공과 실이 드러나는 순간, 공은 본인에게로만 향하고 실은 여지없이 주변 구성원들이 떠안아야 했다. 돌이켜보면 그는 항상 일관된 모습이었다. 모든 공은 내 능력 탓, 모든 실은 구성원이 부족한 탓. 그게 본인과 주변을 구분 짓는 그만의 잣대였다. 그리고 그 잣대로 인해 주변은 점차 피폐해져 갔다. 첫 업무보고에 그것을 깨달았다면 좀 더 빨리 도망칠 궁리를 했겠으나, 누구나 그런 혜안을 갖고 있지는 못했기에 우리는 그가 소시오패스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도망치기 전까지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소시오패스를 부하로 둔 상사들은 그를 이용할수록 자신이 편해짐을 너무도 잘 알기에 소시오패스에게 권한을 몰아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거리낌도 없었다. 그로 인해 자신들이 맡고 있는 조직이 점차 썩어들어감에도 편함이 주는 달콤함에 그 정도는 무감각하게 지나칠 수 있었다. 사실 조직이 무너지고 나면 그 고통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었다. 그 의사결정을 했던 리더들이 끝까지 책임지는 경우는 안타깝지만, 거의 본 적이 없다.




이미지 출처:Photo by Adi Goldstei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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