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밥 잘 사주는 메.정.놈
(메뉴도 정해주는 놈)

(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생존기

by 흔들의자
이 글은 직장생활의 애환을 겪는 많은 독자분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드리는 글이 아닌, 스스로 겪고 있는 지옥 같은 직장생활에 대한 자그마한 위로이자, 그들과는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그들의 만행을 잊지 않겠다는 타산지석의 사료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은 모두 허구입니다)


그는 생각보다 맛집을 좋아했다. 외모만 놓고 본다면 돌이나 얇은 철근까지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생각보다 미각에 예민했다. 처음 곰탕 집에서 식사할 땐 약 800여 개의 맛집 리스트를 휴대폰에 저장해 놓고 있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걸 보고 허풍이 심하다고 치부해버렸다. 그러나 그의 휴대폰에는 정말 [맛집 1. 중구 꼬치구이집]부터 [맛집 812. 신사동 이자카야]까지 진짜 800개가 넘는 음식점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윗분들을 의전하며 차곡차곡 저장해 놓은 맛집이라는데, 그가 모셨던 윗분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은퇴를 했거나, 내가 그들을 상사로 모시는 일은 없길 바랄 뿐이었다.


업무보고 다음날이니 '별일이야 있겠어'라는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했다. 그러나 출근한 지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우울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우리 팀 잠깐 모여봐, 오늘 점심은 상무님이 고생했다고 맛있는 거 사주신다니까. 따로 약속 잡지 말고, 혹시나 선약 있으면 웬만하면 그냥 미루거나 취소해라. 이따가 11시 1층에서 상무님 차랑 내 차로 나눠서 출발할 거니까 미리미리 나와있어라."

팀원들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이 그렇게 조 상무와 함께하는 중식이 결정되었다. 메뉴 또한 그가 알고 있는 800여 개의 맛집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1월 16일 오전 11시 30분 (서대문구 내 유명 김치찜집)
"사장님, 오랜만이네요. 여기 4인 테이블 당 김치찜 4인분, 계란말이 1개, 떡갈비 2개로 세팅해주시면 됩니다. 술은 테슬라로 주시고요."

조 상무는 가게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메뉴와 술을 주문했다. 갑작스레 잡은 중식 날짜도 그렇고, 메뉴도 그렇고 우리는 그저 알아서 시켜주는 걸 맛있게 먹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자, 기획팀 모두 고생 많았습니다. 100% 만족할만한 보고는 당연히 없겠지만 그래도 80% 정도는 우리가 대표님 기대를 만족시킨 것 같습니다. 나머지 기간 동안 분발해서 다음 보고 때는 120%로 기대치를 상회할 수 있도록 해봅시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여러분에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자, 점심이니 가볍게 입가심으로 소맥 한잔씩만 하도록 합시다."

각자 앞에 놓인 소맥 한잔으로 가볍게 목을 축이고 있을 무렵, 빠르게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치찜에 계란말이, 떡갈비까지 세팅되고 난 상을 보니 생각보다 너무 많아 보였다. 원래 푸짐하게 먹는 걸 좋아하나 보다 생각하며 별생각 없이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식사가 끝나갈 무렵 옆 테이블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유 차장, 그 테이블은 왜 그렇게 음식이 많이 남았나요? 그렇게 음식 남기면 못써요. 남 대리나 민 사원이 많이 못 먹는 거 같으니 나머진 유 차장이랑 백 과장이 분발들 하세요. 그거 다 먹어야 후식 먹으러 출발합니다."

유 차장님 테이블은 남 대리와 민 사원(조 상무 비서), 그리고 백 과장으로 4인 테이블이었는데 애초에 음식의 양도 많았지만, 남 대리와 민 사원이 먹는 양도 적어 거의 절반 가까이 음식이 남아있었다. 처음엔 농담으로 한 말이겠거니 하며 적당히 먹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자 조 상무가 다시 한번 경고를 했다.


"제가 한 말 농담 아니에요. 그거 다 먹어야 이동할 테니, 되도록이면 메인 메뉴는 다 비우고 일어나세요. 이 사람들이 맛집에 와서 그렇게 음식 남기면 못쓴다니까!"

조 상무는 정색하며 테이블 내 메인 메뉴는 되도록 다 먹을 것을 종용했다. 남 대리와 민 사원은 평소 먹는 양 이상을 먹어가며 도왔고, 옆 테이블에 있던 나도 배가 덜 찬 것처럼 연기하며 연신 젓가락을 움직였다. 주위의 도움에도 남겨진 음식의 대부분은 유 차장님과 백 과장의 몫이었고, 눈물겨운 먹방 끝에 간신히 바닥을 보였다.


"자, 식사도 다 했으니 이제 후식 먹으러 갑시다. 남자분들은 청포도 주스, 여자분들은 자몽에이드입니다. 이 뒤에 제가 맛있는 집을 알고 있으니 이동합시다."

그렇게 후식까지도 우리에겐 선택권이 하나 없었다. 김치찜집 근처 카페로 이동했으나, 배가 터질 것 같은 상황에서 청포도 주스와 자몽에이드의 맛이 느껴질 리 없었다. 장황한 무용담을 하고 있는 조 상무는 단 두 모금만에 청포도 주스를 다 마신 후 사무실로 이동하자고 했다. 센스 있는 알바분이 테이크아웃 잔에 담아준 덕에 우리는 이것도 억지로 다 마시는 불상사 없이 손에 들고 무사히 사무실로 갈 수 있었다.


상사와의 식사가 당연히 편할 수야 없겠지만, 모두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점심식사였다. 과도한 김치찜 흡입으로 오후 내 속이 안 좋았던 유 차장님은 결국 병원에 다녀왔고, 남 대리와 정 사원은 소화제를 사 먹어야 했다. 팀 전력의 절반 이상이 식사 한 번으로 나가떨어진 걸 보면, 분명 그는 보통 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유 차장님과 난 곰탕에 이어 먹지 않는 음식이 하나 더 늘었다.




이미지 출처:Photo by Henry & Co. on Unsplash

이전 05화#5. 내로남불, 모든 보고의 부족함은 너희들 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