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야근은 필수, 회식도 디폴트(Default)

(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생존기

by 흔들의자
이 글은 직장생활의 애환을 겪는 많은 독자분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드리는 글이 아닌, 스스로 겪고 있는 지옥 같은 직장생활에 대한 자그마한 위로이자, 그들과는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그들의 만행을 잊지 않겠다는 타산지석의 사료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은 모두 허구입니다)


퇴근 시간을 넘겨 무아지경으로 보고서를 쓰다 보면, 감이 올 때가 있다. 그리고 그 감은 슬프게도 적중률이 꽤 높다. 11시를 넘겨가며 오늘도 열심히 집필 중인 이 보고서는 망할 것 같은 감이 온다. 이럴 땐 그냥 '에라 모르겠다' 덮어놓고 내일의 나에게 맡겨버리고 싶지만, 그러기엔 나의 작지만 소중한 월급이,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이 눈에 선해 그런 배짱을 부릴 수는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술자리로 도망가며 보고서 작업은 토스한 이 팀장을 원망하며, 다들 자조적인 목소리로 마저 보고서 작업을 하고 있는 찰나, 유 차장님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이 팀장에게 온 전화라니 싸한 느낌이 들었지만, 한번 끊긴 후 또 걸려온 전화를 어쩔 수 없이 받고만 유 차장님이었다. 술 취한 이 팀장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크게 들려왔다.


"어.. 유 차장, 고생 많지? 아직 사무실에서 작업 중이지? 지금 다들 사무실에 남아 있어?"

"네, 아직 손봐야 할 게 많이 남아서 다들 야근 중입니다."

"어, 그거 일단 내가 하루 미뤄 볼 테니까, 지금 회사 길 건너 공룡 호프로 와라. 여기 지금 상무님도 계셔. 너희들 고생한다고 술 한잔 사주시겠다는데, 하던거 얼른 접고 뛰어나와라."

술 취한 이 팀장이 워낙 큰 목소리로 통화했기에 주변 팀원들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다 같이 들을 수 있었다. '야근하다 말고 갑자기 술 먹으러 오라는 건 무슨 경우일까', '어떤 뇌구조를 가졌으면 저런 황당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 할 수 있지?'라는 황당함에 다들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 하하하.. 이거 가야 돼요? 차장님, 이거 가실 거예요? 남 대리, 이거 우리 가야 되니?"

"회사에 있는 거 뻔히 아는데 도망갈 수도 없고 이거 어떡하죠 차장님? 그냥 접고 가요?"

몇 초간 침묵하며 고민하던 유 차장님도 조 상무가 떡하니 기다리고 있다는데 별 수 없었다. 그래도 내일 보고는 미뤄 준다 하니, '오전부터 깨질 일은 없겠지'란 기대 하나에 다들 억지로 무거워진 마음과 지친 몸을 이끌고 근처 공룡 호프로 향했다.


1월 9일 오후 11시 10분 (회사 근처 공룡 호프)
"자자, 여러분 고생이 많습니다. 제가 기획팀의 노고를 모르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의 머리도 가볍게 해 줄 겸, 술 한잔 시원하게 하고 내일부터 다시 가열차게 달려봅시다. 자, 한잔씩들 받으세요."

"상무님, 그래도 이렇게 구성원들을 챙겨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첫 업무보고 멋지게 끝낼 수 있도록 팀원들이랑 잘 준비해 보겠습니다. 자자, 유 차장 첫 잔인데 소주잔 말고 얼른 글라스로 한잔 받아!"

눈이 반쯤 풀린 이 팀장은 일하다 말고 급하게 끌려온 팀원들에게 술을 강권하기 시작했고, 기다렸다는 듯 조 상무는 소주잔이 아닌 글라스 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주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이 아닌 소주가 가득 담긴 글라스 잔이 구성원들 앞에 하나둘 놓여갔다.


"저, 상무님. 제가 술을 거의 못해서요..."

"지혜야, 일단 잔만 받아. 백 과장도 술 거의 못하는데 지금 잔 받았잖아. 먹지 말고 그냥 짠만해. 요새 누가 술을 강제로 먹이고 그러니. 걱정 마, 걱정 마."

체질적으로 소주 한잔도 먹지 못하는 남 대리 술잔까지 가득 차고 나자, 조 상무는 취기 가득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건배사를 하며 원샷을 했다. 저녁도 대충 때운 상태로 빈 속에 소주를 들이부으니, 알코올이 위로 흡수되는 속도보다 뒷목을 타고 올라오는 취기가 더 빠르게 느껴졌다.


빨리 가서 자리를 파하겠다는 우리의 원대한 계획은 그렇게 조 상무가 건 넨 첫 잔에 무참히 박살 났다. 그 뒤로 소주잔이 몇 잔 돌고, 5~6병의 소주가 비워졌다. 이미 취기가 올라있던 조 상무와 이 팀장은 늘어가는 빈 병과 정신 못 차리는 구성원들을 보며 흥에 겨웠는지 주인에게 구석에 있는 노래방 기계를 사용할 수 있는지 물었다. 안타깝게도 그 호프 내에 남은 손님은 우리뿐이었고 매상을 올리려는 주인장은 기꺼이 허름한 노래방 기계를 내어주며 술을 더 시킬 것을 은근슬쩍 요구했다.


"자자, 제가 먼저 한 곡 하겠습니다. 이어서 이 팀장 그리고, 여기 짬밥 순으로 한 곡씩 하는 겁니다. 다들 알겠죠?"

흥이 난 조 상무의 선창을 시작으로 줄줄이 노래도 불러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술 취한 조 상무는 4~5곡을 연거푸 불러댔고, 이어서 이 팀장이 노래를 부를 때쯤 눈치껏 팀원들이 다 같이 뛰어나가 뒤섞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누가 시작한 곡인지, 누가 부르고 있는지 구분도 안 되는 채로 2~3곡쯤 부르고 다시 소주 4~5병이 비워져 갈 때쯤 시간은 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내일이 없을 것처럼 마시고 부르던 조 상무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갈 채비를 했고, 술 취해 노래방 기계 옆에 쓰러져 자고 있던 이 팀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일어나 조 상무와 함께 대리기사를 불러 사라졌다. 『사업부장-기획팀장 세트』를 돌려보냈지만, 각자의 내상은 너무 컸다.


백 과장은 화장실에서 30분째 나올 기미가 없었고, 남대리는 머리가 아프다며 편의점에서 두통약을 사 먹었다. 늦은 시각 각자 택시를 잡아 헤어진 게 2시쯤이었다. '그래도 내일은 별 탈 없이 넘어가겠지'라는 기대를 하며, 택시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몸을 뉘었다. 그리고 야속하게도 더 이상 내일이 아닌, 오늘 아침은 빠르게 찾아왔다.


1월 10일 오전 10시 (조 상무 방 회의실)
"유 차장, 어제 수정한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되나요? 이래서야 5일 뒤 대표님 보고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주말 포함 5일입니다. 보고서 수준이 올라올 때까지 매일 오전 10시, 그리고 오후 5시 2차례씩 리뷰해가며 완성도를 높이겠습니다. 아니, 이 사람들아 내가 지금 회사 생활이 몇 년인데 상무 달고 난 뒤에도 이렇게 계속 보고서 작업에 손을 대야 하겠어? 허허, 답답하네 정말."

조 상무 리뷰를 미뤄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이 팀장은 어제 먹은 술로 인해 오전 반차를 낸 상태였고, 유 차장님 포함 나머지 팀원들 4명만 조 상무 방에 불려 가 오전 리뷰 동안 능력 없는 직원들이란 핀잔을 들어야 했다. 아직 술도 덜 깬 상태라 무슨 말은 하는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앞으로의 5일이 정말 힘들 것 같다는 느낌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그 고통스러운 5일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다시금 보고서 작업에 매달렸다. 14일 오후 2시, 몇 차례의 고성과 몇 차례의 인신공격을 견뎌내며 만들어낸 보고서 최종안이 나온 뒤로, 조 상무는 3시간 정도 혼자 리허설을 한 뒤, 긴장을 풀 겸 또다시 이 팀장과 술 한잔을 하러 사라졌다.


이제 보고야 어찌 되든 모르겠고 우린 부족한 수면을 취하러 그들이 사라진 뒤 빠르게 퇴근했다. 그리고 노예처럼 몸과 정신을 갈아 넣어 만든 보고서로 첫 업무보고를 하는 1월 15일 아침이 밝아왔다. '그래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유 차장님과 나는 대회의실 오퍼레이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무대에 올랐으나, 긴장한 기색이 전혀 없는 듯한 그의 장황한 첫 업무보고가 시작되었다.




이미지 출처:Photo by Mitchell Lu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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