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주는 우직한 놈이,
과실은 친한 놈이.

(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생존기

by 흔들의자
이 글은 직장생활의 애환을 겪는 많은 독자분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드리는 글이 아닌, 스스로 겪고 있는 지옥 같은 직장생활에 대한 자그마한 위로이자, 그들과는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그들의 만행을 잊지 않겠다는 타산지석의 사료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은 모두 허구입니다)


`19년 12월 중순, 인사 발표로 어수선한 시기

난 직장생활 8년 차에 접어들었고, 현재는 신규사업 론칭을 위한 TFT에서 6개월째 법정근로시간을 훌쩍 초과한 강도 높은 야근을 매일 이어나가고 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야근을 하는 것이냐 묻는다면 내 사업도 아니요, 초과근무 수당을 제법 챙겨주는 것도 아니지만 회사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초석을 닦고 있다는 약간의 공명심, 성취감과 함께 이렇게 노력하면 조금이나마 빨리 승진, 팀장 보임 등 돌아오는 혜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기대심리도 자리 잡고 있었다. 함께한 약 20인의 야근 노예들이 쏟아부은 6개월간의 노력과 회사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경영진들의 빠른 판단으로 신사업은 당당히 `20년 1월부터 B2C 유통사업부로 출범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사업부의 인선이 발표 나는 것이 바로 오늘이라는 풍문이 파다했다. 20인의 노예 중 한자리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 몇몇은 아침부터 눈은 모니터를 향하고 있으나, 마음은 인사발령 공고에 가있어 몇 시간째 같은 화면을 띄워놓은채 오늘 있을 인사발령에 대한 예측을 내놓고 있었다.


"부장님, 최담당님 이번에는 상무 진급하시겠죠? 고생하신 것도 있고 이번엔 꼭 하셔야 할 텐데요.."

"야, 나나 최담당이나 여기서 TFT 6개월, 그전에 사업화 검토 6개월 거의 1년을 뺑이쳤는데, 회사가 그 정도 보상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당연히 되시겠지."

"최담당님 상무 되시면, 부장님도 기획팀장 자리 기대해봐도 되는 거 아니에요?"

"야, 그런 건 기대가 아니라 순리라고 하는 거야 순리. 나 말고 이 신규 사업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냐?"

오늘도 이일도 부장은 본인이 왜 기획팀장이 되어야 하는지 한 TFT 구성원을 붙잡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인사 발령 계획이 2~3주 전쯤 CEO에게까지 보고됐다고는 하나, 아직 팀장 인선까지는 결정 난 게 없는 모양이었고, 이일도 부장은 최담당의 상무 진급에 자신의 팀장 보임까지 패키지로 엮어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이었다.


퇴근시간을 앞두고 다들 오늘은 인사발령 안뜨나 보다 기대를 접는 순간, 여느 때처럼 기습적인 인사팀의 조직 발표 공고가 올라왔고, 역시나 게시판 서버는 다운되고 말았다. 몇몇 광클릭 전사들의 모니터에는 터지기 전 받아놓은 인사 발표 상세 자료가 떠있었고, 20인의 노예 또한 그 모니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자신들이 속할 새로운 사업부의 면면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확인하였다. 누군가는 기쁨의 쾌재를, 누군가는 안타까움의 탄식과 분노를 표출하는 등 좁은 TFT룸은 그야말로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한바탕 감정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 뒤에야 이번 인사 발표의 가장 의문점이 될만한 한 줄의 인사명령이 구성원들의 눈에 띄었다.


B2C 유통사업부 사업부장 : 피터 조 상무
(現 북미법인 경영지원담당, `20년 1월 1일 자 발령)

약 20인의 노예를 이끌던 최담당님은 당연히 상무 진급과 함께 사업부장 보임을 기대했으나, 예상과 달리 과실은 북미 법인에서 온다는 피터 조 상무에게 돌아갔고, TFT룸에 있던 구성원들 모두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 이래서 최담당님 오늘 휴가 내고 안 나오신 건가?"

"이 사업 추진을 의사결정 받기위해 거의 1년을 쏟아부었는데, 회사도 너무 한 거 아니에요?"

"피터 조는 누군데, 상무 진급하면서 사업부장으로 온다는 거야? 누구 연줄이라도 있대?"

다들 충격이 큰 인사 발표였기에, 업무는 뒷전이고 이번 인사 발표의 배경엔 무슨 속셈이 있는 것인지 각자 추리하기 바빴다. 그중 인사팀장과 동기이기도 한 이일도 부장은 피터 조 상무의 배경을 알아보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야, 죽 쒀서 개 줬다. 피터 조 상무 예전에 엄CEO와 북미법인에서 같이 일했었대. 엄CEO가 영업 담당하던 시절 경영지원팀장이었단다. 이 정도면 뭐 말 다했지. 자기 사람 그냥 보란 듯이 데려온 거네"

"아니, 국내 사업은 전혀 모르는 사람을 그것도 숫자만 만지던 사람을 사업부장으로 앉혀요? 그럼 저흰 어떻게 해요?"

"아, 그런 사람 밑에서는 일 못할 거 같은데, 한순간에 커리어 꼬이게 생겼네요. 하아..."

"야, 내가 제일 애매해. 그 사람이 날 기획팀장 시켜주겠냐? 아... 진짜 열받네 이거..."

구성원들의 분노, 억울함과는 상관없이 연말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종무식을 이틀 남겨둔 늦은 오후, 전사 팀장/팀원 인사발령이 게시판에 공고되었고, 조금은 의아한 한 줄의 발령문에 다들 시선이 멈췄다.


B2C 유통사업부 기획팀장 : 이일도 부장
(現신사업 추진 TFT 파트리더, `20년 1월 1일 자 발령)

재주는 우직한 놈이 부리고, 과실은 친한 놈이 가져갔다고 울분을 토하던 이 부장은 그렇게 원하던 기획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도 어느 정도 과실을 가져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그 과실은 먹을 만한 것일까. 문득 쓸데없는 의문이 들었다. TFT룸 내 모든 구성원들이 잘됐다는 축하 인사를 건넸고, 환하게 웃으며 조만간 술 한잔 하자는 이 부장님의 모습은 아마 그해가 가장 밝았던 모습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발령문 계속) B2C 유통사업부 기획팀원 (총 4명)
: 유일한 차장, 차기도 과장, 백성민 과장, 남지혜 대리

그리고 우린 한 팀이 되었다.




이미지 출처(북 커버):Photo by Eugene Lagunov on Unsplash

(제목):Photo by Becky Pha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