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생존기
이 글은 직장생활의 애환을 겪는 많은 독자분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드리는 글이 아닌, 스스로 겪고 있는 지옥 같은 직장생활에 대한 자그마한 위로이자, 그들과는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그들의 만행을 잊지 않겠다는 타산지석의 사료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은 모두 허구입니다)
2주간의 철야 작업과 몇 번의 조 상무 히스테리를 견뎌낸 끝에 회장님 보고의 날이 밝았다. 안타깝게도 보고는 석식 연계로 인해 오후 4시부터 시작이었고, 오전 내 우리는 조 상무 방에서 막판 날 세우기를 당하고 있었다.
"아니, 그 페이지는 일부 문구 수정하고 유첨으로 돌리세요. 그리고 대표님께 드릴 최종본 파일에서는 처음 유첨 페이지 4개 말고는 전부 삭제하세요. 어차피 회장님께는 내가 다 구두로 설명할 내용들이니까 굳이 대표님께 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발표할 최종본에만 혹시 모르니 포함시켜 놓으세요."
본부 전략팀으로 보낼 최종 보고서에도 사업 추진 로드맵에 대한 숫자적인 타당성을 검토한 상세 유첨 자료를 빼라니, 의아하긴 했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막판 초치기 수정을 거친 끝에 11시부터 대 회의실에서 최종 리허설이 진행되었고, 그 진행자료에도 여전히 상세 유첨 자료 대부분은 빠진 상태였다. 리허설 시간이 얼마 안 되다 보니, 본문 중심으로 빠르게 진행되었고 본래 작성된 대부분의 상세 유첨들이 삭제된 상태라는 건 엄 CEO 포함 오늘 보고에 참석하는 경영진 대부분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다.
"유 차장님, 본부 전략팀에 송부한 최종 보고서에 상세 유첨 진짜 빼놔도 되는 거예요? 유통을 1년 내 3배 가까이 늘리겠다고 써놓고는 그에 대해 숫자적으로 검토한 타당성은 다 유첨으로 빼놨는데 이거 CEO랑 다른 경영진 분들은 안 봐도 될까요? 혹시 물어보면 아무도 답변 못할 텐데요."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종 발표용 자료는 우리가 오퍼레이팅 할 거니까 필요하면 그때 페이지 띄우지 뭐. 아마 본인 혼자 알고 있다가 질문 나오면 짜잔~ 하고 답변하려는 치졸한 심산은 아니겠지? 그런 거면 나이 먹고 너무 유치한데. 일단 냅둬라, 밥이나 빨리 먹고 오자."
평소 같았으면 한 번쯤 문제 제기를 했을 법한 유 차장님도 그간의 날 세우기에 신물이 났는지 그냥 시키는 대로 하자고 하고는 그 문제를 덮어 버렸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급격한 유통 확대에 대한 우려는 본보고 때 회장님의 첫 번째 질문사항이었다.
3월 26일 목요일 오후 4시 (회사 내 대회의실)
통상적인 그룹 회장의 계열사 방문이었지만, 새로운 신사업을 추진 중인 회사 입장에서는 이번 기회에 많은 것을 얻어 내겠다는 목적이 깔려있었고,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CEO입장에서도 눈도장을 찍기 위해 많은 것들이 준비된 자리였다.
CEO는 무난하게 회사의 지난 3개년 성과에 대해 소개하고, 이어서 회사의 명운을 걸고 사업구조의 전환을 준비 중인 B2C 유통사업부를 소개하면서 보고의 바통을 조 상무에게 넘겼다. 그룹 회장님 앞 대면보고라면 사실 떨릴 법도 한데, 평소보다 상기된 얼굴로 약간의 웃음기를 머금은 채 조 상무는 발표를 이어나갔다.
"금번 보고 자리는 회장님 예하, 많은 분들의 관심과 지지로 출범한 저희 B2C 유통사업부가 어떻게 회사의 사업구조를 성공적으로 전환시키고, 향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거듭날지에 대해 설명드리는 자리입니다.
이를 위해 유통사업부는 올해 그리고 3년, 5년 뒤를 준비하는 마스터플랜을 세워 그룹의 B2C 유통 첨병으로 사업을 확장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그 핵심적인 과제는 크게 세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조 상무는 준비된 내용들을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감 있게 발표해 나갔다. 리허설 때는 일부러 살살했나 싶을 정도로 회장님 앞에서의 본보고는 그의 독무대였다. 보기에 따라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흡사 그가 회사의 CEO처럼 보일 것도 같은 모양새였다. 준비한 20여분의 발표를 마치자, 그룹 회장은 준비한 보고를 잘 들었다며 엄 CEO가 적임자를 잘 찾아 배치한 것 같다는 칭찬으로 말문을 열었다.
"오늘 보고는 전체적으로 기대 이상의 것들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에 놀라웠습니다. 준비 중인 신사업을 통해 그룹의 B2C 유통 첨병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전국 상권에 있는 직영 유통들을 지금의 3배 이상으로 내년까지 확장하겠다고 한 점이 조금 우려가 되네요. 엄 CEO, 지금의 회사 자금 및 인적 여력으로 볼 때 너무 공격적이지 않나요?"
"네, 조금 공격적으로 보실 수도 있으나 그 부분은 CFO 부문과 가용 가능한 투자 여력을 논의해가며 잘 준비해 보겠습니다. 인력은 현재 B2B 부문의 인력 중 일부 전환 배치하고, 경력직 전문 인력 충원을 통해 대응할 예정입니다."
칭찬에 이은 기습적인 첫 질문에 엄 CEO는 무난하게 답변했으나, 이미 상세 유첨으로 해당 내용들에 대해 준비해 두었던 조 상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답변을 이어받았다.
"회장님, 말씀 주신 우려사항들은 촘촘한 투자계획을 통해 회사의 체력에 무리가 가지 않는 수준으로 재무적 부담을 완화할 수 있게끔 준비 중입니다. 또한, 유통이 갖춰진다 한들 그 안에서 우리 제품의 가치를 고객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영업사원이 핵심인데, 이는 전문 인력 외부 충원과 함께 내부 전문인력 육성계획을 통해 올 하반기까지 확보 완료하겠습니다.
상세한 내용들은 준비한 자료들을 통해 마저 설명드리겠습니다. 내년까지 유통 확대를 위해 필요한 투자 재원은 총 600억 수준으로......."
조 상무는 본인이 돋보이긴 위한 목적으로 숨겨두었던 상세 유첨 자료를 띄우며 설명을 이어 나갔고, 그의 설명에 질문을 한 회장님은 만족스럽다는 듯 조 상무를 믿고 맡겨 보겠다는 대답으로 화답했다. 이어진 질문들에 대해서도 미리 준비해두었던 내용들을 활용하여 조 상무는 막힘없이 대답했고, 엄 CEO 포함 나머지 경영진들은 그저 청중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흔치 않은 기회에 그룹 회장에게 어필하기 위해 간간히 본인이 아는 지식들을 총동원해 첨언하는 임원들이 있긴 했으나, 그저 구차하게 보일뿐 대세에 지장을 줄 순 없었다.
이번 보고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조 상무였다. 그는 이번 보고의 모든 공을 본인에게로 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비록 아군들의 뒤통수를 쳐가며 얻은 공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보고의 주인공이 자신만이 되기를 바랐고, 자신만이 빛날 수 있도록 이후에도 모든 보고를 준비했다. 핵심적인 자료들은 여전히 어느 부서에도 공유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원칙은 본인을 유통 사업부장으로 앉힌 엄 CEO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이미지 출처:Photo by Eric Smart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