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3분 만에 회의실에서 쫓겨 나는 법

(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생존기

by 흔들의자
이 글은 직장생활의 애환을 겪는 많은 독자분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드리는 글이 아닌, 스스로 겪고 있는 지옥 같은 직장생활에 대한 자그마한 위로이자, 그들과는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그들의 만행을 잊지 않겠다는 타산지석의 사료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은 모두 허구입니다)


2월은 항상 짧은 근무 일수만큼이나 숨 가쁘게 지나갔던 것 같다. 특히나 올해 2월은 설 연휴가 1월이었음에도 더더욱 숨 쉴 틈 없이 몰아쳤다. 새로운 사업부 출범 이후, 첫 업무보고에서 내뱉은 100여 개의 실행과제들을 챙기느라 2월엔 정시 퇴근한 날을 세는 게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인 건 윗분들에게 하는 큰 보고가 잡히지 않아, 보고서 작업에 치여 조 상무에게 갈굼 및 무시당했던 1월보다는 그래도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2월이었다. 하지만, 2월의 짧았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3월 2일 월요일 오전 10시 (조 상무 방 회의실)
"이제 우리의 실력을 만천하에 보여줄 시간이 왔습니다. 3월 26일 그룹 회장님께서 우리 계열사에 방문하시는데, 그때 우리 사업부가 B2C 유통 사업에 대한 청사진을 보고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노력해 온 것들을 하나하나 보고서에 담아낸다면 분명 좋은 성과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팀장과 기획팀은 이번 보고 준비에 만전을 기해 주세요. 회장님이 오시는 자리이지만, CEO께서는 간단히 회사 개요만 소개하시고, 나머지 보고는 전체적으로 제가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 회장님께 우리의 청사진을 보여드리고 필요한 것들은 의사결정받을 수 있는 자리가 생긴 것에 벌써부터 기대가 큽니다."

보고 없이 넘어간 2월을 시기라도 하듯, 3월 초가 되자마자 그룹 회장님 보고 일정이 잡혔다. 회사에 대한 전체적인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였지만, 그 기회를 십분 활용해 CEO와 조 상무는 새롭게 추진하는 B2C 유통사업에 대해 보고 드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보고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조 상무는 본인이 등판하게 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하루 기획팀원들에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3월 17일 화요일 오전 10시 (조 상무 방 회의실)
"다음, 다음, 다음! 지금 자료는 우리가 지난 2개월간 해온 것들에 대한 나열에 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여줄 모습이 그게 다인가요?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이 핵심입니다.

그 모습이 그려지지 않나요? 여러분들이 그 모습을 그리지 못하겠다면, 지금부터 제가 그리는 걸 그냥 따라서만 그리세요. 미래 모습을 키울 능력이 안되면, 따라 그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머리를 맑게 하고, 지금부터 제가 화이트보드에 그리는 미래 모습들을 최대한 그대로 보고서에 담아내세요."

조 상무는 본인이 생각하는 사업부의 미래 모습과 우리가 그려낸 보고서 내 현실과의 괴리에 크게 분노했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만을 위한 사업부의 미래 모습을 화이트보드에 그려나갔다. 사업부의 더 큰 미래 모습은 누구도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은 숫자와 사업모델들로 그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기획팀장 포함 어느 누구도 그것의 타당성에 대해 토를 달진 못했다. 한 땀 한 땀 그려나가는 조 상무의 모습엔 확신과 희열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가 그린 사업부의 미래 모습엔 우리보다 B2C 사업을 8년 앞서 시작한 경쟁사를 2년 내 따라잡고, 3년 내 국내 최대 B2C 유통회사로 성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상품 개발, 유통 확대, 매출 수준 및 수익성 확보 등 모든 부분에서 회사의 여력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너무 공격적이었다. 하지만, 조 상무는 회장님 보고에 이 정도 크기의 청사진을 그려내지 못하면 우리 사업부와 우리 팀의 존재 이유는 없다고 못 박았다.


다들 이게 실현 가능성이 없는 청사진이라는 걸 알면서도 남은 기간 열심히 그려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회장님을 위한 조 상무의 멋진 그림은 본인만의 감동을 담아낸 채 한 땀 한 땀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값은 나중이겠지만, 누가 치르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며칠째 계속된 철야 보고서 작업에 남 대리는 몸에 이상이 생겨 출근길에 그대로 병원으로 향했다. 회장님 보고 이틀을 남기고 막판 보고서에 날을 세우던 조 상무는 이렇게 몸이 약해서야 본인의 스탭을 할 수 있겠냐고 성을 냈지만, 나와 유 차장님이 커버 가능한 수준이라고 애써 안심시킨 뒤에야 문을 닫고 본인의 방으로 사라졌다.


3월 24일 화요일(회장님 보고 D-2일) 오전 10시 (조 상무 방 회의실)
"차 과장, 첫 페이지 Overview 내용이 너무 딱딱하니까 다시 써야겠어요. 내가 다시 불러 줄테니까 쭉 받아 적으세요. 금일 보고는 우리 회사가 직면한 대내외 환경 변화와 경쟁사들의 사업 전환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

한번 말문이 터진 조 상무는 구어체로 문장들을 쏟아냈고, 그것들을 한 번에 받아 적어 내려가기엔 나의 타이핑 실력이 미천했는지 본인이 말하는 속도 대비 문장이 써지는 속도가 느려지자, 그는 곧 고성을 질렀다.


"고작 부르는 것도 따라 적지 못합니까? 이래서 남 대리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나가세요!! 써서 줄 테니까 밖에 나가서 그냥 써준 대로만 작성하세요!!!"

회의실에 앉아 타이핑을 시작한 지 1분도 안되어 난 밖으로 쫓겨났고, 회의실엔 이 팀장과 유 차장님, 조 상무만 남았다. 그리고 이어진 보고서 작업은 자연스레 유 차장님이 맡게 되었다.


"자, 3번째 페이지 우리 회사와 직영점, 그리고 유통 대리점의 배치를 원이 아니라, 직각 삼각형의 각 꼭짓점으로 옮겨보세요. 거기서 설명하는 게 좀 더 직관적이겠네요. 아니, 아니, 정삼각형 말고, 직각 삼각형이요.

유 차장, 내 말이 어렵나? 삼각형 그리는 게 어려워? 아니 이 사람들이 남 대리 없다고 이렇게 보고서 작업이 안되서야. 나머지 보고서는 쓰거나 그려서 줄 테니 그냥 다 나가! 이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야 어찌 그룹 회장님 보고를 하겠나! 노트북 들고 당장 나가!!

PPT에 직각 삼각형을 그리라는 요구에 정 삼각형을 그렸던 유 차장님은 내가 쫓겨난 지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똑같이 회의실 밖으로 쫓겨났다. 고성을 지른 조 상무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평소 열어두던 본인의 방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둘이 합쳐 3분 만에 회의실에서 쫓겨난 뒤, 어이가 없어진 유 차장님은 커피 사 줄 테니 담배나 피우러 가자며 건물 밖으로 나갔다.


"차 과장, 회사 생활 15년 하면서 직각 삼각형 못 그렸다고 쫓겨 나 보긴 또 처음이네. 우리 이러려고 신사업 부문에 지원한 거냐? 이제 3개월 지난 건데 벌써 회의가 든다. 하아...."

이제는 금연하겠다며 하루에 담배 1~2개비만 피우던 유 차장님도 그날은 한 자리에서 3개비나 줄 담배를 피우고는 다시 사무실로 올라갔다. 남 대리가 유능했거나, 우리가 부족했거나, 또는 조 상무의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던 날이었거나 그 셋 중 하나였겠지만 이러한 대우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사업부가 점차 그가 그린 껍데기대로 외형을 갖춰갈수록 우린 몸도 마음도 망가져갔다.




이미지 출처:Photo by Sigmund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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