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연작-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 말한 사람이 있다. 그도 귀뚜라미가 한철 지새우고 홀로 지친 사슴 닮은 그믐이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 광경을 주워 담기 전까지 산은 물이었다. 그도 그러하기를 바랬을 것이다
-늦은 11월, 월악산, 상현골 산허리에 숨소리마다 짐승이다. 가장 가난한 길로 가야만 한다. 아주 가서 돌아오지 말아야 한다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새를 받쳐준다. 그때마다 새는 마치 처음처럼 흔들리지 않는 법을 익힌다. 허나 날개를 쥐고 있던 새들은 갈 곳이 없어 이내 사람이 된다. 칠흑같던 눈에 흰자위가 들어선다
-본디 붓이란 꺾으라고 있는 것이다. 자화상의 순간들에는 더욱 그렇다. 이미 쓰고 만 글들은 문장부호를 뒤집어주면 멀리 흘러가리라
-한동안 나는 나도 알지 못하는 책의 주석을 달며 생계를 이어왔다. 주석에 주석이 달리고, 이제는 그런 것을 믿지 않은 지 오래다. 차라리 젊은 기러기들, 저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목이 긴 철새들을 매너리즘의 철사에 꿰어놓는 짓이 더 현명할 것이다. 어차피 낮밤은 식별할 수가 없다
-나 또한 그 아름다운 목을 양손으로 비틀거나 줄톱으로 썰어버리는 등의 즐거운 상상을 하곤 한다. 그러면서 짐짓 왼손 손등으로 내 목을 혼자 애무해본다
-눈먼 동물들이 향긋한 라일락 향기를 풍긴다. 박제사는 잠깐 어디로 갔다. 골조만 남기고 전부 증발시킨 채 완성된 건물들, 진흙밭에 다시 엎드려본다
-작정하고 가려면 갈 수 있지만 그러진 않을 만큼 먼 도심,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붙이려 우표와 펜, 편지지에 봉투까지 마련해놓고는 백지에 한 자도 쓰지 못한 채 그만두었다.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쯤 그 아픈 허리로 어루고 있을 하지감자가 안 떠올라서
-나는 언제든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언제든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언제든 할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언제든 회복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두릅 순이 돋아 올해도 참 무더웠다. 구름 사이로 달이 하루 굶은 부엉이 눈마냥 맵게 떴다. 온 사방이 개구리 울음소리라 귀가 먹는다
-단언컨대 나는 풀이 바람보다 빨리 눕거나 일어나거나 저 스스로 웃고 우는 짓거리는 본 적이 없다. 아니, 전혀 보고 싶지도 않다. 겨울을 나고 아직 누렇게 마른 채 있는 풀잎만큼 무거운 것은 없기에
-폭력을 제외하고, 변하지 않는 것들은 모두 틀렸다. 폭력은 실존이자 실존의 가장 명확한 증명 그 자체다. 그러므로 폭력만큼 정당한 것은 없다
-9월 9일 오후 9시, 하늘빛이 너무 숱하다. 저 산에 밤이 너무 많아서, 모닥불에 찌르라미 소리가 밤새 탄다
-안개는 늘 나무 냄새 나는 물고기들로 가득하다. 어디 하나 숨어들 곳 없는 나무의 꿈은 온통 구름일지니
-붉은 주목 열매를 줍다가 거미줄 한 날 하늘을 가르고 있어 그만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