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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삼대목 59-

by 김병주

여태껏 약은 절대 안 치는 줄 알았던

할머니가 오늘은 고추밭에 약 쳐야겠다며

새벽 첫머리부터 주섬주섬 채비키에

엄마랑 나는 굳은 발걸음으로 따라서고

위태롭게 쪼그라든 할머니

사람 서넛은 들어가 눈감을만한 꺼먼 들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메타실, 디메소몰프, 또 무슨 약을

뿌려넣고 각목으로 휘휘 젓는 동안

통 안에 살던 애꿎은 거미, 날벌레 다 빠져 죽고

명줄 같은 호스를 질질 끌어

낡은 펌프를 덜덜덜 돌리며 할머니는

당신만한 약뿌리개를 메고 온 고추밭 누비는데

드넓은 고추 바다에 할머니 보이지도 않고

너무나 세찬 물줄기만 고추를 때려

연하거나 상한 놈 가차 없이 떨구며

장대비 온 듯 잎마다 샛노란 이슬 드리우고

마스크도 안 쓰고 약 치던 할머니가

올해는 고추가 너무나 염병이 들어서 썩어 마르니

약을 몇 번 더 해야겠다 하는 걸

벌레들 떠다니는 약 저으며 듣는 동안

할머니 다시 안 보이고

나는 괜히 바람처럼 가라앉은 기분으로

우리 쪽에 퍼지는 노란 안개만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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