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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릉(仁陵)

by 정유지

인릉(仁陵)

출처:조선왕릉 사진작가 김상일

정조의 붕어 상황 준비가 덜 된 군왕

맏아들 효명세자 갑자기 급서했지

인릉은 세종 영릉의

예전 왕릉 아닌가

흉지란 이유로도 천장 된 파묘 자리

왕조의 급격 몰락 왕권의 약화 징조

홍경래 난 일어나자

안동김씨 급부상


-정유지-




서울시 서초구 헌인릉길 36-10에 있는 인릉은 조선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 김 씨 능이다.


파주에 능을 천장하여 이곳에 조성하였다. 원래 이곳은 세종과 소현왕후의 영릉이었다. 세조 이후 영릉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거정 등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현재의 여주 영릉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순조(1790~1834, 재위 1800~1834)는 이름 공(吏). 자 공보(公寶). 호 순재(純齋). 묘호는 당초 순종(純宗)이었으나 1857년(철종 8)에 개정되었다.


정조는 1786년(정조 10년) 문효세자(장남)와 의빈 성씨의 연이은 죽음에 상심했다. 이에 정조는 1789년(정조 13년) 장헌세자의 능을 이장했고, 이후. 정조와 후궁인 박준원 딸 수빈(綏嬪)의 2남으로 태어났고 1남 문효세자가 일찍 죽어 1800년(정조 24)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6월 11세의 나이로 즉위한다.




즉위와 함께 영조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이 실시되었다. 인릉은 원래 세종 영릉이 있다 흉지(凶地)란 이유로 천장 된 파묘 자리이다. 인릉의 택지는 왕권의 약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순조가 즉위를 한 후 조선왕조의 역사가 말 그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시발점이 된다. 불과 10살밖에 안되었던 왕 순조가 왕으로서 직분과 역할을 잘 감당해 낼 수 없었다.


결국 순조 11년인 1811년 홍경래의 난이 터진다. 순조는 유례없는 기근과 수재 또한 전염병과 크고 작은 민란과 역모의 사건 등에 시달린다. 안동김 씨가 권력의 중심부로 급부상한다.


한편,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는 순조의 건강이 악화되어 대리청정을 하면서 세도정치를 억제하고 왕정의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21세의 이른 나이로 훙서(薨逝)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었다. ‘효명(孝明)’이라는 이름대로 그는 효성스럽고 명민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명민함의 핵심은 뛰어난 문학·예술적 능력이었다.




순조는 순원왕후와 함께 인릉에 있지만 당시엔 유약한 군주이자 조선왕조가 쇠락의 문턱으로 맥없이 내몰리는 군주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는 임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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