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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릉(思陵)

by 정유지

사릉(思陵)

사릉 34).JPG 출처:조선왕릉 사진작가 김상일

열일곱 지아비를 열여덟 꽃나이에

영도교 이별하며 유배지 보낸 사연

비운의 육십 사년간

단종 애도 종결자

-정유지



사릉(思陵)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 능이며 단릉이다.


처음엔 민간 신분 묘로 조성되었다가 중종 때 대군 부인의 예로 복위되고 숙종 때 왕후 능으로 추봉됐기 때문에 다른 능 비하여 단출하다.


14세의 나이에 타고난 성품과 검소의 미덕을 인정받아 간택되었고, 그 다음해에 어린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이 영의정 자리에 앉아 조정을 좌지우지한 때였으므로, 단종과 정순왕후 부부는 스스로 아무런 일도 결정할 수 없었다.




결국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수강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사육신의 주동으로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던 사건이 발각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고, 유배지에서 결국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18세 나이에 영도교(永渡橋)에서 단종과 이별한 정순왕후의 모습이 후대에 전해진다.


부인으로 강등되어 궁궐을 나온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동망봉 기슭에 초가집 짓고 시녀들이 해오는 동냥으로 끼니를 잇다가 1521년 6월 4일을 일기로 장장 7대 왕대에 걸친 삶 마감한 비운의 종결자이다. 한편, 정순왕후는 굉장히 미모가 뛰어난 소유자였다.


김택영의 한사경(1918)에 의하면, 정순왕후 미모에 반했던 신숙주가 세조에게 자신의 첩으로 달라고 청원했다고 한다. 비록 미천한 신분으로 전락해도 일국의 국모였던 자신을 그것도 지아비를 죽음으로 몰고 가게 했던 원수 신숙주가 첩으로 달라고 청원했다는 사실을 정순왕후가 알게 되었다면 그 심정은 참담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중종은 단종부터 7대에 걸친 왕대 산 정순왕후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이후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부인도 정순왕후로 복위되고 신위는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가 종묘에 안치되었다.




평생 단종만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기에 능호를 사릉이라고 붙였다.


한 사람만을 연모하며, 생애를 마칠 수 있는 것 자체로 아름다운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낭군은 죽어서 가장 많은 이들이 찾는 장릉의 주인공이 되고, 그 부인은 가장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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