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릉은 사적 200호이며, 중종의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의 능으로써 서삼릉에 처음으로 조성된 능이다.
7세 때 어머니 여의고 월산대군 부인 박 씨의 밑에서 자랐다. 장경왕후는 1491년 영돈녕부사 윤여필 딸이며 본관은 파평이다. 중전의 자리에 오른 지 8년 만에 아들을 낳고(인종) 7일 만에 산후병으로 승하한다. 당시 25세. 장경왕후 능은 처음엔 현재 내곡동 있는 헌인릉 자리에 중종 수릉과 함께 쌍릉으로 조성되고, 희릉이라는 능호가 내려진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탐욕은 죽은 자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중종의 장인이 된 김안로는 정적을 몰아내기 위해 천릉사건을 일으킨다. 희릉 조성 당시, 봉분 밑에 큰 돌 있었는데, 그 돌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능을 조성했으며, 이로 인해 세자와 왕실에 안 좋은 일 생길 터이니 능을 옮겨야 한다고 중종에게 고했다.
중종은 능을 옮기는 것을 허하고, 당시 묘역 조성에 관여된 인물들을 모조리 제거해 버렸다. 그 후 능은 조성된 지 22년 후인 1537년(중종 32)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중종의 수릉과 함께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자, 중종 능을 희릉 옆에 조성하고 능호도 정릉으로 고쳤다. 정자각도 두 능 사이에 하나로 만들었다. 하지만, 중종의 세 번째 계비 문정왕후는 중종과 장경왕후가 함께 묻혀 있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을 지금의 삼릉공원(선정릉) 자리로 옮기게 하였다.
중종의 능을 빼앗긴 서삼릉의 정릉은 다시 희릉이 되었다(1562년, 명종 17년). 그러나 문정왕후도 중종과 함께 묻히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