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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릉(徽陵)

by 정유지

휘릉(徽陵)

출처:조선왕릉사진작가 김상일

효종이 내린 존호, 왕실의 자의 대비

서인과 남인 간의 장렬왕후 상복문제

운명적 예송(禮訟) 논쟁기

권력이동 분수령

-정유지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88) 조씨의 능으로 하나의 봉분아래 한 분을 모신 단릉이다.


장렬왕후 조씨는 1624년 12월 16일(음력 11월7일)에 태어나 1635년 승하한 인렬왕후의 뒤를 이어서 1638년 음력12월 인조의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슬하에 아들을 두지 못했고 1649년에 인조가 승하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으며 1651년 효종에게 자의(慈懿)라는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가 되었다.




이후 의붓아들인 효종이 승하한 1659년 대왕대비에 올랐다.


며느리 효종비 인선왕후 승하한 1674년에 대비인 장렬왕후 상복문제 두고 서인과 남인간 2차례 예송논쟁이 있었는데 이 논쟁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당쟁으로 기록된다.


생전에 특이한 점은 그녀로부터 야기된 사건인 관념적인 권력의 암투로 알려진 복상문제(服喪問題)에서 발단이 된 예송(禮訟)사건을 들 수 있다.


송시열 등 서인(西人)과 윤휴 등 남인(南人) 대립이 표면화된 게 바로 인조의 차남이었던 효종의 상(喪)에 몇 년의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에서 시작되었다.


서인의 기년설(朞年說, 1년)과 남인의 삼년설(三年說, 3년)의 1차 대립 이어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상에 역시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8개월)과 남인의 기년설(朞年說)로 2차 대립은 결국 서인에서 남인에게로의 권력이동을 가져왔다. 당쟁으로 인해, 권력 지형도가 바뀐 것이다. 당쟁은 피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하나의 뇌관임을 알 수 있다.




숙종 14년 자손 없이 승하하여 건원릉 서쪽 언덕에 안장되었다.


장렬왕후는 인조 계비에 이어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지만, 효종을 의붓아들로 삼아 자애로운 어머니상을 심어주었기에 왕실의 어른으로서 그 품위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인연의 끈은 누구나 소중한 자산임을 일깨워 준 자의대비의 생애였음을 재조명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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