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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 Oct 10. 2022

6. 비가 온다는 것은

고대하던 그 날이 왔다. 비오는 날.

배달기사들이 비가 오는 것을 내심 기대하게 되는 이유는 단 하나. 단가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기상할증이라는 프로모션이 붙어 최소 천 원 이상 금액이 상승한다. 고작 천 원이 아니고 무려 천 원이다. 기본단가는 2900원에서 3900원으로 오르게 되는데, 편의점 행사 제품 3+1 판매처럼 3건을 완료하면 한 건은 그냥 덤으로 받는 느낌이 든다.



비 예보가 시작된 첫 날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 창 밖 하늘부터 확인했다. 기본 단가가 바뀌는 순간 당장 튀어나갈 작정이었다. 두근두근. 12시를 몇 분 남겼을까. 창문 밖으로 후두둑 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3900원. 축제는 시작됐다. 


시야가 가리지 않도록 투명 우산을 챙기고 검정 양말에 크록스를 야무지게 신었다. 신발장 앞에서 바로 첫 콜을 잡을 수 있었다. 몇 번 방문한 적 있는 돈까스집이었다. 비는 다행히도 우산을 쓰고 빠른 걸음으로 무리없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내렸다. 매일 이 정도 날씨라면 좋겠다. 프로모션 단가 놓치지 않을 거에요.






빌딩 안에 위치한 한 사무실에 세번째 배달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타자마자 바로 다음 콜이 들어왔다. 가본 적 없던 가게에다 거리가 900미터로 멀었지만 처음 보는 단가 4400원에 눈이 번뜩였다. 지체없이 바로 수락했다. 들뜬 발걸음을 서두르며 1층 입구로 나가려는 순간. 오 마이 갓. 

6층까지 다녀온 잠깐 사이에 하늘은 완전히 변해있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대책없이 퍼붓는 가짜 물줄기같은 비가 미친 기세로 내리고 있었다. 어쩐지 운이 좋더라니. 하아......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정도 비는 내려줘야 도보로 4400원이라는 단가를 주는구나.


배달을 시작한 이래 처음 보는 단가와 처음 겪는 날씨였다. 한 시간도 안 돼 만 이천원을 금방 찍고 한껏 들뜬 마음이 아직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그대로 몇 분이 지났을까. 회전 유리문 앞에 서서 멍하니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니었다. 배달을 취소할 게 아니라면 한시라도 빨리 이 건물을 벗어나 비를 뚫고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우산 아래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보폭을 최대로 늘려 걷기 시작했다. 지도 앱을 켜둔 핸드폰 액정화면은 점점 빗물로 차올랐다. 바지와 신발, 가방은 완전히 축축하게 젖었다. 빗줄기는 약해질 줄 몰랐다. 가게에 도착하기도 전에 핸드폰이 침수 상태로 인식하고 고장나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동 위치를 표시하는 빨간 점이 오류로 멈춘건가 싶게 느리게 움직였다. 한참이나 걸은 것 같은데 아직 절반도 넘게 남았다. 


이 정도 비라면 오토바이 배달은 절대 안 된다. 걷다가도 넘어질까 걱정되는 상황에 무려 오토바이라니. 빗물에 미끄러지며 일어날 아찔한 순간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생명을 담보로 일을 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위험수당 같은 게 붙어야 될 것 같다. 아니 정말로 그런 식의 추가 보상이 붙는다 해도 과연 그걸 수락하는 게 맞는건지 모르겠다. 도보 4400원의 단가로도 부족하다 생각될 만큼의 비가 내리는 날에는 어플 자체에서 배달을 일시중지 시키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누군가 배달 관련 기사 댓글에 이렇게 써놓은 걸 본 적이 있다. 도로가 위험해지는 날씨에는 왠만하면 배달을 시키지 말자는 의견을 반박하며 기사 지들이 돈 벌겠다고 하는 일인데 왜 고객이 주문을 하면 안 되냐고. 한 번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될 일이다. 서로의 평안과 안전을 위하는 일. 

예전에도 그런 생각이었지만 직접 배달을 해 본 뒤로는 더 확실해졌다. 도로가 위험해지는 날씨엔 절대 배달을 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그것이 한 생명을 지키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분명 팬티까지 다 젖었겠다 싶은 생각이 스칠 즈음 가게에 도착했다. 음식은 다행히 아직 따뜻했고 배달지까지 거리는 멀지 않았다. 포장에 물이 튈까 조심히 들어 가방에 넣은 뒤 픽업완료를 누르자마자 바로 신규 콜이 들어왔다. 비가 오니 역시 주문이 밀리는구나. 배달지 상태를 확인해보니 대부분 지역이 매우바쁨 상태가 되어 있었다. 

평소에는 점심 피크타임이 끝나고 1시가 되기 전에 바쁨 상태는 사라진다. 이후로는 칼같이 콜이 없다가 저녁 피크시간이 되어서야 다시 조금씩 바빠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오후 2시 이후에 매우 바쁨이라니. 확실히 비오는 날은 달랐다. 하지만 빗줄기는 누그러 들 줄 몰랐고, 이제 그만 하는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거절을 누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 새로운 콜이 들어왔다. 어차피 옷도 죄다 젖었는데 가까운 곳이면 하나만 더 하고 갈까 싶은 유혹이 순간 들었지만 이내 이성을 찾았다. 간신히 두번째 거절을 눌렀다. 그러자 또다시 들어오는 새로운 콜.


놀라웠다. 비오는 날의 위력이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단가도 단가지만 수요 자체가 엄청났다. 이대로는 새로 들어오는 콜 구경만 계속 하다 시간 다 보내겠다 싶어 단호하게 운행 중지로 전환했다. 

역대급 단가 4400원은 딱 한 번 맛본 셈이었다. 가장 달콤하고도 가장 지독했던 잊지 못 할 콜이었다.



배달 일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비가 많이 내렸던 날, 날씨의 영향을 직방으로 받는 육체노동자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엄청난 빗줄기에도 멈추지 못 하고 달리고 있는 이들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비가 온다는 것은 단순한 기후의 변화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노동 현장이 온전히 바뀌게 되는 것이며,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위험과 불안을 떠안아야 하는 육체노동자가 많아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장마, 무더위, 한파, 강풍, 폭설. 그 어떤 상황에도 변함없이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 

정직한 노동이 존재하는 길 위의 그들에게서 살아있는 진짜 인생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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