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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 Sep 29. 2022

5. 잘 부탁드립니다. 이거면 되는데

동네 도서관 바로 옆 건물에 있는 식당에서 콜이 들어왔다. 평소 매일같이 드나들던 도서관을 막상 배달 가방 메고 지나가려니 괜히 민망했다. 동네에 딱히 아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도서관 문화 센터 강좌에서 안면을 튼 사람들은 몇 있었다. 백수가 된 이후 늘 똑같은 검정색 옷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같은 층의 같은 자리에서 머리를 한껏 틀어 올린 채 앉아 있었다. 이런 여자 사람을 누군가는 분명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망상 섞인 걱정이 들었다.

최대한 튀지 않는 검정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평소 도서관에는 한 번도 입고 가지 않았던 짙은 녹색 외투를 걸쳤다. 운동화 역시 평소와 다른 것으로 꺼내 신었다. 평소보다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는 복장을 전신 거울에 비춰보고 있자니 이렇게까지 마음 졸이며 나갈 일인가 싶었다.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이유는 뭘까.



실은 이 일이 부끄러웠나보다. 이제야 인정하게 됐다. 딱히 숨겨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족 아닌 누군가에게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도 없다.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처음부터 이런 마음이 들었던 건 아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을 때 안녕하세요 대답을 제대로 들은 적이 거의 없다. 그들에게 나는 하루에도 몇 십번 비슷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배달기사들 중 한 명이었다. 매번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들어가는 가게가 매번 새로운 입장에서는 답인사는 커녕 환영받지 못 할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장정같은 아저씨만 보다가 나같은 인물이 나타나서일까. 네가 할 수 있겠냐는 눈빛으로 대놓고 홀대하는 시선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도보배달이라니. 걸어서 잘 가져가겠냐고, 이게 그 가방에 다 들어가겠냐며 배달 취소하면 안 되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주인 입장에서 나는 미덥지 못 한 배달원의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럴 때마다 보란듯이 떡 벌어진 어깨를 괜히 으쓱하며 무거운 음식도 거침없이 들었다. 가방도 최대한 능숙해 보이는 자세로 휙 둘러 메고는 큰 소리로 수고하세요를 외쳤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눈치가 보이던 가게의 콜은 차마 두 번 다시 수락할 수 없었다.


배달지에 갈 때도 대부분 문 앞에 놓아 달라는 요청이 많지만 가끔 먼저 문을 열고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있다. 특히 중년의 아저씨들이 많았는데 나를 보면 일단 흠칫 놀란다. 그리고는 예외없이 위 아래로 스캔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해본다 쳐도 음식 전달을 완료하고 계단을 밟으며 내려가는 동안에도 들어가지 않고 서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 행동은 상당히 꺼림칙하다. 그럴 때면 등을 홱 돌려 나도 똑같이 그 사람을 쳐다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일을 하는 중이고 또 돈을 벌러 가야했다. 찜찜한 기분을 애써 무시한 채 앞만 보고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처음 보는 상호명의 수제 요거트 가게에서 콜이 들어왔다. 가게 앞에 도착하자 통유리 안으로 훤히 보이는 실내 공간이 매우 협소해 선뜻 들어가지 못 하고 있었다. 준비된 음식이 나와 있는지 살피기 위해 몸을 최대한 길게 뻗어 미어캣 모드가 된다. 

몇 분이 흘러도 여전히 포장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배민원입니다." 새하얀 조리복을 입은 직원이 주문번호를 확인한 뒤 바로 냉장고에서 밀봉된 종이가방 하나를 꺼냈다. 한 치의 군더더기 없는 정갈한 손 동작이 예사롭지 않다 싶었는데, 이는 목례라는 정중하고도 놀라운 몸짓으로 이어졌다. 그리고는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수년간 사회생활을 하며 새롭게 누군가를 만나는 자리에서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나 또한 많이 했다. 부탁의 진짜 의미보다는 인사치레 겸 일종의 관용적 용도로 사용했다. 그런 나에게 본래의 뜻 자체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잘 부탁드립니다는 신선하다 못 해 충격으로 다가왔다. 찰나였지만 온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 한 마디가 뭐라고 너무 황송해서 당황한 나머지 황급히 안녕히 계세요를 외치고 뛰쳐 나왔다. 겪어본 적 없던 배려 깊은 친절함에 몸둘 바를 몰랐던 것이다.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이 고객에게 무사히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부탁드린다는 진심. 단 몇 분간의 만남이었지만 평소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할지 예상이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 가게를 방문한 이후 배달을 하며 늘 따라다니던 묘하게 불편했던 마음의 정체를 알아냈다. 배달노동자에 대한 몇몇 사람들의 무시 섞인 태도 때문이었다. "아직 안 나왔으니까 나가서 기다리세요." 라는 말을 많이 들듣게 되는데 늘 불쾌한 표정에 쌀쌀맞은 톤이었다. 들어가서는 안 될 곳에 눈치없이 들어가 욕을 먹는 기분이었다. 문전박대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그런 하대가 점점 익숙해지게 되고 어느새 그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배달 노동자는 원래 그런 취급을 받는 위치에 있는 존재라는 생각. 사회적으로 낮게 평가되는 일을 내가 하고 있다. 이 생각이 뇌를 지배했고 나도 모르는 사이 의기소침한 인간이 돼 버린 것이다. 그러니 겨우 요만큼의 친절에도 엄청난 타격감을 느꼈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다들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 육체가 힘든 것은 스스로 극복할 문제라쳐도 정신이 힘든 것은 타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서로가 조금만 신경써서 친절한 말투와 정중한 행동을 보여줄 수는 없을까. 

대단한 것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저 잘 부탁드립니다 한마디면 충분하다. 한 번 입으로 뱉어 보는 순간 생각보다 별 거 아니라는 걸 느낄 것이고 어느새 눈빛도 태도도 조금씩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순간들이 쌓여 우리 주변과 사회 전체, 나아가 전세계가 평화로워지는 일에 일조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작지만 확실한 친절이 불러 올 나비효과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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