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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 Sep 19. 2022

3. 프로걱정러의 첫 배달

타고나게 굵고 큰 목소리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압도적인 기골 덕분에 어디서도 약해보인다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다만 배달기사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이미지를 생각했을 때 조금 염려스러웠다. 라이더 마스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선글라스, 헬멧을 착용한 뒤 한 줄기의 햇살과 빗물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한 차림의 방수복에 장갑까지 끼고 있는 남자 사람. 이것이 가장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배달기사의 모습이 아닐까.


그런데 나는 배낭 하나 달랑 메고 걸어서 배달을 해야 한다. 어디까지 복장을 갖춰야 할지, 어떤 말투와 태도로 행동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씩씩하게 "안녕하세요. 배민 픽업 왔습니다."라고 할까, 능숙한 척 덤덤한 톤으로 "수고하세요."만 하고 나올까.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내향인은 세상 만사를 고민과 걱정거리로 발전시키는 능력이 있다. 무슨 일이든 실행에 앞서 여러 번 시뮬레이션해 보는 건 물론, 관련 후기 검색에만 최소 며칠에서 최대 몇 달까지도 투자한다. 

배달 가방을 구매하기 전 수십 건의 후기들을 봤지만 부족했다. 20대 N잡러, 30대 퇴근 후 투잡, 40대 가장의 전업. 상황별로 다양한 후기들이 넘쳐났다. 그렇게 일주일째 영상을 보고있자니 더 이상 새로운 내용이 없었다. 직접 해 본 듯한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이제는 나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차를 받는 방법은 일반방식과 AI방식 2가지가 있다. 일반배차는 여러 개의 콜들이 순차적으로 한 화면에 뜨는데 동일한 내용을 여러 배달기사들이 동시에 보고 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수락버튼을 누른 이에게 콜이 배정되는 방식이다. AI배차는 오직 나에게만 오는 콜인데 카톡 알림 오듯이 상단에 팝업으로 뜨는 창을 눌러 1분 안에 수락을 할지말지 결정 해야한다.


일반배차를 켜 보았다. 1분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기찜 가게에서 콜이 떴다. 할까말까 고민하는 그 몇 초 사이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뭐가 그리 겁이 나는지 오른쪽 검지 손가락은 핸드폰 화면 위에 멈춘채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망설이는 사이 콜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허망했다. 이런 식으로 우물쭈물 하다가는 오늘 안으로 시작하기는 글렀다. 다음에 들어오는 콜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수락해야지.


AI배차 모드로 전환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새로운 콜이 왔다. 생각이 뇌를 거치기 전에 손가락이 움직여야 한다. 배차수락. 

화면이 바뀌면서 픽업까지 남은 시간이 떴다. 서둘러 배달 가방을 메고 운동화를 신었다.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픽업지까지의 거리를 누르면 카카오맵으로 자동 연동되어 지도를 보고 길을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정말 쉬웠다. 최첨단 통신 기술의 발달에 감탄하고 배달의 민족의 위상을 실감했다. 길치인 나도 큰 어려움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픽업지에 도착하면 배달 봉투에 음식이 미리 다 준비돼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저기.."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으니 직원이 다가왔다. 커다란 비닐봉투를 건네주며 "주문번호 확인해주세요." 라는 직원의 말에 긴장한 나머지 다짜고짜 내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전혀 당황한 기색없이 직원은 "네. 이거 가져가시면 돼요." 하고는 태연히 주방으로 돌아갔다. 

앱에서 주문 상세내용에 들어가면 주문번호가 따로 있는데 이 번호가 픽업 음식에 붙은 용지에 적힌 주문번호와 일치하는지 반드시 대조해야 한다. 그래야 음식을 잘 못 가져가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배달기사로 보이지 않을까봐, 처음이라 어설픈 티가 날까봐, 도보배달이라 놀랄까봐.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걱정을 수집하던 지난 날이 떠올라 머쓱해졌다. 직원들은 너무 바빠서 배달기사에게 눈길 줄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시작도 전에 쓸데없이 걱정으로 낭비한 시간을 반성하며 픽업완료 버튼을 눌렀다.


 




드디어 첫 배달을 한다. 덮밥 2인분이라 가벼웠다. 눈을 지도에 고정시킨 채 빨간색 위치 표시가 올바른 방향으로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고객요청사항에 [정문 말고 후문 주차장 입구로 와주세요] 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지도가 알려준 위치로 도착했지만 입구로 보이는 철문은 자물쇠로 묶여 굳게 잠겨 있었다. 후문이 어디인지 물어볼 만 한 사람도 없어 그저 종종거리며 근처를 뛰어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래봤자 하나의 건물인데 한 바퀴 크게 돌아보면 어디쯤엔가 문 같은 게 있겠지의 심정이었다. 

하늘은 점점 어둑해지고 마음은 급했다. 늦게 배달됐다고 본사에서 전화가 오는건 아닌지, 그렇다면 어떤 패널티가 있을지, 고객을 만나면 어떤 욕을 듣게 될지. 또 온갖 염려들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내 동네다. 단지 정확한 위치로 찾아가려니 낯설게 느껴질 뿐이다. 마음을 다 잡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조금 늦더라도 찬찬히 주변을 살피며 걸어보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마음이 급해 미처 보지 못 하고 지나쳤던 아주 좁은 골목 하나를 발견했다. 조심스레 발길을 돌려 걷다보니 주차장치고는 아주 협소한 공간 하나가 나타났다. 여기다. 차 몇 대가 있었고 끝에는 입구로 보이는 자그마한 문 하나가 보였다.


마침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려는 사람이 있어 바짝 따라 붙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었다. 5층까지 걸어서 가야했다. 5층이 그 동안 내가 알던 그 높이의 5층이 아니었다. 고지에 도착했을 땐 심장이 문제 있는건가 싶을 정도로 심하게 뛰었다. 설마 내 체력이 이 정도로 저질일리 없다. 운동부족은 확실했다.

미쳐 날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노크를 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그냥 놓고가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음식을 내려 놓고 돌아섰다. 힘이 풀린 다리를 이끌고 다시 1층으로 가기 위해 터벅터벅 계단에 발을 딛었다. 등 전체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버린 것도 그제야 알아챘다. 


쉽지 않은 첫 배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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