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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 Aug 24. 2022

2. 나태 지옥에서 만난 배달 가방

평생을 흘러가는대로 살아온 나답게 퇴사 후 일정은 일단 본가에 내려가 푹 쉬다 오는 것이었다. 

엄마가 해 주는 따뜻한 집밥을 매 끼니 챙겨먹었다.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언제 회사라는 걸 다녔던가 싶게 빠르게 백수생활에 적응했다. 알람없이 잠이 깨서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오늘 뭐할지 고민하며 시간을 펑펑 써버리는 생활이 적성에 딱 맞았다. 남들은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 쉬게 되면 일을 해야한다는 불안함에 결국 금방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다고 하던데. 나는 아니었다. 너무 좋아서 이대로 가능하다면 평생 회사에 다니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다닐 적엔 매일 화가 나 있었다. 정확한 실체도 없는 분노가 점점 쌓여만 갔다. 출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실을 때마다 지옥행 열차를 탑승하는 심정이었다. 타인은 지옥이라 생각했고 어떻게 하면 최대한 인간들과 엮이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만큼 심장이 뜨거웠다. 선한 감정이든 악한 감정이든 마음은 늘 불타고 있어서 뱉어내고 싶은 말들이 넘쳐났다.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일기장으로 쏟아졌다. 유독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날은 저녁을 먹고 책상에 앉았다가 자정이 넘어 손등이 뻐근해짐을 느끼고서야 멈춘 적도 있다. 그만큼 글을 쓰는 것은 나에게 힐링이자 구원이었고 꿈이었다. 


시간만 여유롭게 주어진다면,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고 그럼 훨씬 제대로 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매우 오만한 생각이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디까지 나태할 수 있는지 나를 통해 알게 됐다. 일을 쉰지 몇 개월이 되었지만 글쓰기 따위는 내 인생에 없었다는 듯 그저 넷플릭스를 보고 카페를 가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기만 하고 읽지는 않는 하루들의 연속. 그렇게 대책없이 소처럼 누워 지내던 어느 날, 주인집에서 연락이 왔다. 전셋집 2년 만기를 앞두고 재계약을 위해 보증금을 증액할 터이니 며칠까지 해당금액을 입금 해달라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동안 별다른 돈 걱정없이 퇴직금을 야금야금 쓰며 지내고 있었는데 남은 돈을 몽땅 전세금으로 넣어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곧 계좌에는 약 12만원 정도가 남게 될 예정이었다. 맙소사. 좋은 시절은 다 갔다. 낼 모레 마흔, 꿈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회사도 때려쳐놓고는 정작 노력은 커녕 맨날 카페투어나 다니며 유유자적. 한량으로 지내온 꿈같았던 지난 몇 개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서른 중반에 부모님께 용돈 좀 보내달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배짱 넘치는 인간은 아니었다. 알바가 급했다. 어디든 가능한 곳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시작해야 했다. 알바몬 앱을 깔고 이력서를 업데이트 했다. 

졸업 후 취업준비를 할 때 단기로 했던 사무보조 일이 마지막 알바였을 것이다. 거의 10년이 지난 셈이었다. 그 사이 시급은 놀랍게도 2배 가까이 올라 있었다. 그 때의 시급과 비교해 이 정도라면 무슨 일이든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갖고 싶은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듯 가능해 보이는 모든 공고에 이력서를 넣었다. 


그렇게 일주일, 이주일이 지나도 휴대폰은 조용했다. 단 한 군데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차라리 이력서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이미 다른 사람 뽑았구나 했을텐데 이력서를 확인했다고 뜨는데도 연락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힘들게 했다. 

이것이 30대 중반의 현실이구나. 알바를 하기 싫어서 안 한다는 생각만 해 보았지 구해지지 않아서 못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굉장히 당황스럽고 민망했다. 그리고 슬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이 때문일 것이다. 기존에 저장해 둔 이력서에서 크게 고친 것은 없었다. 심지어 사진도 그대로 두었다. 우대 연령이 20대로 된 곳에서 연락이 없는 건 이해가 됐다. 그런데 나이제한 없음이라 해 놓고 연락이 없는 건 아무래도 실제로는 20대만 뽑는 것이 현실인 듯 했다. 


알바도 때가 있는 것이다. 30대 중반의 알바생. 흔치 않은 조합이었다. 


연락이 없는 상태로 3주가 지나자, 내가 사장이라도 발랄한 20대를 뽑지 미혼인지 기혼인지도 알 수 없는 30대를 굳이 뽑진 않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큰일났다. 돈은 필요한데 그렇다고 이대로 다시 아무 회사에나 지원해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새로 올라온 괜찮은 공고가 없나 수시로 확인하며 틈틈이 당근마켓에 들어갔다. 남아도는게 시간인데 팔 수 있는 물건은 모두 팔아 조금이라도 살림에 보탤 작정이었다. 사진을 찍고 판매글을 올렸다. 구매를 원하는 채팅이 오길 기다리며 새로 올라온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던 중 발견한 민트색 손잡이의 대형 배달가방.


[배달의 민족 배달가방 팝니다. 만오천원에 드릴게요. 상태 좋습니다.] 


이 글을 보자 배달알바가 도보로도 가능하다는 광고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폭풍 검색에 들어갔다. 도보배달에 대한 후기는 넘쳐났다. 배달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 몇 개를 보고나니 대략 감이 왔다. 예상했던 모습과 달리 크게 걱정할 건 없어 보였다. 3시간 남짓되는 온라인 교육을 수강하고 승인만 나면 바로 시작 가능했다. 심지어 주급이었다. 한 주 일하면 며칠 뒤 정산 후 바로 입금된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돈이 급한 나에게 딱이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알바는 이것 뿐. 망설일 것이 없었다. 판매자에게 당장 채팅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구매하겠습니다! 언제 어디가 편하실까요?]



4시간 뒤 홍대입구역 3번출구 올리브영 앞에서 판매자를 만났다. 민트색으로 배민커넥트라는 글자가 크게 박힌 가방이 멀리서도 한 눈에 보였다. 예상을 뛰어 넘는 엄청난 크기에 놀랐다. 마치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배낭으로 만들어 어깨에 지고 다니는 모양새였다. 부피에 비해 무게는 없었지만 직접 양 쪽 어깨에 둘러메고 거리를 활보하려니 묘하게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도보배달이라니.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투자금 만 오천원이나 뽑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설렘반 걱정반. 얼마만에 느껴보는 두근거림인지. 그날 밤 교육 영상을 시청한 뒤 최종 테스트까지 완료했다. 배민커넥트 앱을 깔고 본인인증도 마쳤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자 이제 진짜 배달을 하게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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