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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 Sep 24. 2022

4. 하루살이 인생

시작 전 뭘 그렇게 두려워했나 민망할 정도로 불과 며칠 사이 배달 일에 완벽 적응했다. 그저 운동하는 기분으로 열심히 걸었을 뿐인데 돈을 벌 수 있다니. 왜 이걸 이제야 알았을까. 진작 할 걸. 


회사를 다닐 때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 하는 환경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회식 날짜가 잡히면 며칠 전부터 어떤 핑계로 빠질지 고민하느라 업무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회식이라는 말이 옆에서 들리기만 해도 온 몸에 소름이 돋는 사회부적응 만랩이었다. 이런 나에게 꼭 맞는 일은 따로 있었던 걸까. 35년 만에 발견한 천직. 앞으로 내 인생에서 배달 일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스트레스 없이 즐기는 일로 돈을 번다는 것. 꽤 있을 듯 하지만 본인이 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을 실제 만나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스트레스가 없으면 그만큼 돈이 적어 불만이고, 돈은 많이 받지만 그만큼에 해당하는 스트레스를 감당해야만 하는 일 또한 힘들다. 적성과 성향에 맞지 않는 사회생활을 10년 가까이 견뎌낸 이라면 분명 둘 중 하나에 해당될 것이다. 반쯤 미쳤거나 반쯤 도인이거나.



인간은 자고로 다양한 일을 경험해 봐야 그 중 본인에게 가장 잘 맞는 분야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월급으로 받는 급여 방식보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나면 바로 그 날의 수입을 확인할 수 있는 일일 정산 방식이 나에겐 훨씬 동기부여가 됐다. 사실 사무실에 앉아서 하는 일이 노동강도 대비 시급은 훨씬 높다. 가성비 효율 측면에서 따지자면 도보배달은 그다지 추천할 만한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성보다 감성에게 압도적으로 많은 지분을 내어 준 나의 뇌구조 덕분에 배달 일은 만족도 최상이었다. 

즐겁게 일 하며 돈을 벌 수 있다니. 그저 신이 났다.






배달 일을 시작한 이후 매일 아침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눈을 뜨자마자 배민커넥트 앱에 들어가 오늘의 단가를 확인하는 것. 

도보 배달의 기본 단가는 2900원인데 주문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몇 백원씩 추가 할증이 붙는다. 앞자리 숫자가 주는 착각의 힘은 꽤나 커서 3000원 이상의 콜은 왠만하면 무조건 수락을 눌렀다. 그러다 보니 잠이 깨자마자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 배낭을 둘러메고 집을 나서는 날이 많아졌다. 기상 알람으로 이보다 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는 것은 없었다.



저녁 피크시간이 되면 끊김없이 콜이 이어졌다. 배달완료를 누르자마자 이어지는 AI배차의 새로운 부름에 바로 수락. 수락. 또 수락을 누르는 내 모습은 기계에 끌려다니는 인간 아바타 그 자체였다. AI의 노예가 된 기분이었다. 눈 앞에 떠다니는 3천 몇 백원의 돈에 혹한 인간이 거대한 배달 게임 속 아바타가 되어 여기 저기로 끌려다니고 있다. 슈퍼마리오가 눈 앞에 놓인 황금색 동전을 먹기 위해 정해진 루트를 따라 움직이듯 실사판 배달마리오 게임에 참여한 느낌이다.


새로운 콜을 수락하고 완료를 누르기까지 배달앱과 지도만 보고 계속 걷다보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쉬지 않고 다리를 움직이다 문득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에 미세한 떨림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제야 3시간 가까이 지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식이다. 평균적으로 1시간에 3건 정도 할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4건까지도 가능은 했지만 확실히 무릎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달랐다. 



이틀 연속 4시간을 하고 난 다음 날이었다. 2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제대로 챙겨먹지 않고 나왔더니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계속 나고 손이 떨리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제 그만 좀 움직이고 영양분을 섭취하라고 몸이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이 때부턴 이제 집에 가서 뭐 먹지 생각 뿐이다. 

기력이 떨어지면 무조건 육류가 땡긴다.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고기 메뉴를 찾았다. 족발이었다. 뼈없는 족발 소자를 구매하고 2만원을 결제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늘 배달 내역을 확인했다. 총 6건 완료에 금액은 19300원이 찍혀 있었다. 


19300원을 벌었는데 20000원을 쓴 것이다.



힘들게 몸을 쓰고 돈을 벌어서 쓰는게 나을까. 힘들게 몸 쓰지 않고 안 벌어서 안 쓰는게 나을까.


결국엔 둘 다 0의 값으로 수렴한다. +1-1=0 과 0+0=0. 

과정이 어찌됐든 최종값은 같다. 그런데 정확히 따져보면 전자는 오히려 마이너스 값이 될 수도 있다.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추가로 들여야 하는 시간까지 따지면 -1.0이 아닌 -1.N로 계산해야 할 것이다. 19300원과 20000원도 정확히는 700원이 손해다.

돈을 벌긴 벌었는데 오히려 벌지 않았을 때보다 더 마이너스가 발생하는 상황. 남는 이득만 따진다면 이런 식으로 일을 하고 돈을 쓰는 것이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을 때도 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수지타산에 전혀 맞지 않는 하루 벌어 하루 쓰는 삶. 


진정한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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