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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 Oct 23. 2022

8. 콜사와 글사

배민도보의 최대 장점을 꼽으라면 낮다 못 해 거의 없다시피한 진입장벽이다. 이력서도 필요 없고 면접도 없다. 그저 배달 앱을 실행시킬 수 있는 핸드폰을 가지고 있고 걷는데 문제 없으면 된다. 차별이나 조건없이 들어와 언제든 나갈 수 있다.

누가 그랬던가. 전업주부가 주식을 시작하면 그 때는 시장을 떠나야 할 때라는 말이 있듯, 배달 일에 1도 관심없던 30대 여자 사람이 배달을 하게 되었다는 건 어쩌면 이 시장도 이제 레드오션이 다 됐다는 말일지 모른다. 


코로나가 장기화되고 백신 접종률이 높아진 시점에서 맞이한 2022년의 봄은 조금씩 배달 시장의 수요와 공급 균형을 깨트리기 시작했다. 요식업은 날씨와 계절의 영향을 즉각적으로 받는다. 비 오는 날이 주문 특수라면 야외 활동하기 좋은 계절은 다른 의미의 특수를 맞는다. 콜이 사라진다.

식당들의 웨이팅리스트와 야외 테이블 수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배달업체의 주문 전화는 반대로 줄어든다. 이런 현실에서 배달의 민족 최하위 계층 도보에게 주어지는 콜이란. 거의 없음의 상태. 걸으며 배달하기 좋은 날은 곧 야외로 나들이 나가기에도 최적인 날이라는 뜻이다.


 




살랑거리는 봄바람과 군더더기 하나없이 맑은 하늘을 만끽하며 오늘도 걷는다. 지나가며 보이는 길가의 왠만한 음식점들은 모두 만석. 걷다보니 지하철역 2개를 지나왔지만 휴대폰은 여전히 조용했다. 

배달을 시작한 이래 역대 최장의 정적. 배차요청을 켜 놓은 상태에서 콜을 받지 못한 채 30분 정도 지나면 한 콜이라도 꼭 배정되곤 했다. AI의 자체 로직이 움직인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호출이 없다니. 휴대폰에 문제 있는게 아니라면 본사 시스템에 오류가 생긴게 틀림없다. 자동화된 프로그램의 랜덤 배차 로직이라더니. 


도로에 오토바이들이 저렇게 많은데 나만 콜이 하나도 없다고? 

 

알바몬으로 이곳저곳 수십통 지원하고 그 어디서도 연락 한 번 오지 않아 절망했던 시절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었다. 세상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다는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란 인간이 얼마나 무용지물한 존재인지 확인받은 기분. 

애가 탔다. 왜 이런 상황이 된 것인지. 배차가 이 정도로 귀하다면 주문이 적기도 적거니와 배달기사의 공급이 많아진 탓도 이유이지 않을까. 주식을 했을 때도 남들이 다 벌고 나간 시장에 뒤늦게 들어가 콩고물 한 줌 못 먹고 닭 쫓던 개 신세가 됐었는데 배달 시장에서도 이럴 줄이야. 삶을 사는 방식이 참 한결 같다. 그때 거기서도 지금 여기서도 여전히 지각이다.


카페 배다트에도 기사들은 점점 느는데 비해 수요는 앞으로 더 줄어들 일만 남았다는 우려의 글들이 올라왔다. 오죽하면 호출이 없는 상황을 일컬어 콜이 죽었다는 표현을 써서 '콜사'라 부르고 있었다. 

콜사를 몇 번 겪은 이후, 단가에 상관없이 배달요청이 들어오기만 하면 무조건 수락을 누르기 시작했다.  2900원은 하지 않겠다고 정했었는데. 100원만 보태면 아메리카노를 두 잔이나 사 먹을 수 있다 생각하니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단가가 얼마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되었다. 


모든 행복과 기쁨은 결핍에서 시작된다. 오랜 굶주림 후에 먹는 음식은 무엇이든 맛있게 느껴지듯이 사회에서 불러주는 자리가 없던 채로 오랜 시간을 견뎌본 사람은 작은 일이라도 진심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엄마가 예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본인 나이가 되면 일을 하고 싶어도 더 이상 불러주는 곳이 없어 할 수 없다고. 그래서 힘들고 보상이 적은 일도 기회만 주어지면 감사하게 여기고 즐겁게 하게 된다고. 아직 엄마 나이가 되려면 멀었지만 어떤 뜻인지 아주 잘 알 것 같았다. 






슬슬 여름이 오고 있었다. 낮에는 해가 뜨거워 걷는게 어려워지자 저녁에만 한 두시간 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수개월 동안 조금씩 누적되어 온 피로는 언제부턴가 도통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특히 허벅지부터 무릎 아래까지 통증이 심했다. 몇 개월째 이러고 있으니 아무래도 걷는 걸 자제해야 사라질 증상 같았다. 

그래도 버틸만은 했나보다. 매일 밤 폼롤러로 뭉친 다리를 풀어주며 '이번 주가 정말 마지막이다.' 다짐해놓고 다음 주에도 여전히 걷고 있었다.



자기계발서가 말하는 성공법칙 중에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것이 있다.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별 생각없이 먼저 처리하다 보면 정작 진짜 중요한 일을 해야할 때에 필요한 에너지는 이미 고갈되고 없다는 것이다.

지금 내 모습이 그랬다. 글 쓰는 일이 1순위가 돼야 했다. 통제되고 계획적인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글 쓰다가 시간 날 때 짬짬이 기분전환 삼아 용돈벌이해야지' 했던 처음의 계획은 어디 가고 점점 집착적으로 새로운 콜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몇 개월 동안 쉬지 않고 지속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회사까지 관둬놓고는. 글 쓰는 것만 해도 부족한 형편에 배달 일로 하루하루를 애매하게 보내고 있었다.


나 지금 대체 뭐 하고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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