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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 Oct 29. 2022

9. 서울 하늘 관람료

지도가 안내하는대로 따라 걷다보면 종종 예상치 못 한 난관을 마주칠 때가 있다. 

지도 위의 빨간 점이 멈춘 곳은 건물 입구 바로 앞인데 실제 눈 앞에는 함부로 넘을 수 없는 높이의 거대한 담장이 있어 몇 백 미터를 더 돌아가야 했다. 급한 마음에 길가에 놓인 벽돌을 주워다 밟고 넘어가볼까 고민했지만 현실적으로 병원비가 더 나올 것 같아 실행에 옮기진 못 했다. 배달지연 알림이 뜨기 전에 도착하려면 1분 1초가 소중한데 이런 식으로 시간이 지체되면 속상하고 화도 난다.


옥상에 급하게 옥탑을 세운 듯한 낡은 주택에는 미로처럼 생긴 철제 계단이 숨겨진 곳이 있다.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면 당장이라도 툭 하고 떨어져 날라갈 기세다. 조명 하나 없이 깜깜한 밤에 가파른 계단을 밟을 때면 식은땀이 절로 났다. 그런 와중에도 실수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일념하에 배달지에 도착한 순간부터 주소 표지판을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호수가 적혀 있지 않은 반지하의 경우 전화를 걸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음식을 문앞에 놓고 대문 밖으로 나오면서도 뒤돌아 다시 한 번 호수와 번지수를 체크했다.


걱정 많은 성격은 어딜 가지 않아서 어디서든 나답게 일하고 있다. 덕분에 배송건수 400건을 달성하는 동안 잘못된 주소로 배달하는 사고는 한 번도 없었다. 겨울철 패딩을 입고 있을 때도 겨드랑이는 항상 땀으로 젖어있었으니 긴장감 없이 일 했던 적은 단연코 없으리라. 이것이 고객만족도 100% 달성의 비결이라 하겠다.






가까운 위치에 있어도 들어갈 일이 없던 고층아파트로 배달을 갈 때가 있다. 10층 이상만 올라가도 생각지 못 한 뷰를 만난다.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못 봤을, 늘 있어 왔지만 몰랐던 우리 동네의 풍경들. 저멀리 비슷하게 생긴 수많은 빌라 중에 내 집도 있겠지. 매일 돌아다니던 거리를 평소보다 조금 높은 시야에서 내려다 보기만 했을 뿐인데 전혀 새로운 도시에 온 기분이다.


서울에 산지도 10년이 넘었지만 주거의 형태는 늘 같았다. 빌라. 붉은색 벽돌로 만들어진 오래 된 빌라였다. 덕분에 대학교 1학년 시절부터 바라온 오랜 소망이 하나 있다. 옆 집 창문과 우리 집 창문이 마주보고 있지 않은 집에 사는 것. 누워서라도 좋으니 창문을 열었을 때 마음 편히 하늘을 감상할 수 있었으면.

서울 땅에서 창문을 열고 거리낌없이 하늘을 볼 수 있는 공간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추가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있다는 걸 몰랐다. 누구나 집에서 마음대로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창틀은 액자이고 하늘은 작품이었다.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관람료를 지불해야 한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간절한 바람이 될 수도 있었다. 동네 뒷산에만 올라봐도 이 많은 집들 중에 어찌 내 집 하나 없는 것인지 매번 놀랍다. 



겨땀을 벗삼아 한참을 걷다보면 30층이 넘는 주상복합 아파트 근처를 지날 때가 있다. 위풍당당한 자태로 푸른색 불빛을 뽐내고 있는 모습은 언제봐도 위압적이다. 그 아래를 개미처럼 종종거리며 지나가고 있는 나. 매일 바삐 움직이며 일하고 있지만 고생하며 벌어봐도 저축은 커녕 하루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현실. 종아리에 알이 단단히 배기고 티셔츠가 온통 땀으로 젖을 때까지 걸어도 2년마다 매번 짐을 꾸리며 새롭게 이사갈 걱정을 해야한다. 


자유롭게 용돈 벌이로 시작한 일인데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졌다. 회사를 관둘 때 이미 고액 연봉자가 되는 인생에서는 벗어났다. 아니 애초에 연봉을 고액으로 받은 적도 없다. 고작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긴 월급 하나 잃었다고 사람이 이런 식으로 우울해지다니. 돈을 생각하면 왜 늘 작아지는 걸까. 남들 시선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인생을 선택하기로 해놓고 무슨 미련인지 모르겠다. 여전히 비교와 욕심을 내려놓지 못 하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움직이는 계획적인 생활이 필요했다. 흘러보낸 시간에 대한 애매한 후회는 그만하고 배달앱부터 지우기로 결심했다. 누적된 피로를 풀어 육체 에너지를 회복한 뒤 하나의 목표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가장 필요했다. 정말 작가가 된 것처럼 일정한 루틴을 정해 매일 책상 앞에 앉아야겠다.


나에게 필요한 건 하루 세 끼의 일당이 아니라 하나의 글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글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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