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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증스럽다

by 고대현

금일 물건이 부족했었던 냉장고가 비교적 넉넉하게 채워졌다. 어머니의 노고가 있었다. 나는 어떠한 노력도 가하지 않았다. 동생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고맙지도 않으면서 고맙다고 표현을 했고 상대방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고자 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면서 고생했다고 표현을 했다. 나는 어머니를 향한 언행이 가식적이었다. 상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후 평소처럼 의자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사전을 매만지고 있었다. 읽고 있는 책은 레 미제라블- 몇 페이지 넘기다가 내팽개쳤다. 본인의 가식에 치가 떨렸다. 이내 감정은 잠잠해졌다. 그러나 다시 책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언가 스쳐서 지나간 것 같았다. 내가 현재 책을 읽어도 될까? 또 다른 하나의 오판이 아닐까? 급작스럽게 고뇌하고 있었다.

극심한 괴로움에 몸서리를 치다가 이내 의자에서 일어나서 좁아터진 골방을 배회하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오판의 의미를 정정하고 싶었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었다!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또 다시 죄책감이 들었다. 스쳐서 지나가는 가족들의 노고가 떠올랐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재차 앉기를 반복했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책은 여전히 내팽개쳐진 상태로 있었다. 물을 좀 먹으면 나아질까 싶었다. 물을 먹었다.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다시 의자에 앉았다. 책을 펼쳤다. 책을 던졌다. 사전을 펼쳤다. 사전을 던졌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에서 앉았다가 일어나서 골방을 배회하다가 또 다시 앉았다.

와중에 레 미제라블은 민음사 기준으로 4권까지 완독을 했다. 배경지식이 부족하여 완독만 했다. 모든 것이 그저 불만족스럽게 느껴졌지만 이러한 사태의 책임을 타인에게 찾지는 않았다. 다음 읽을 책은 민음사 기준 분노의 포도 1권이었다. 현재까지 책을 펼치지 않았다. 사전도 펼치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 읽기 시작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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