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게도 점차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사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뎌내지 않으면 달리 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함께 요가 수련을 한 사람들 중에는 자격증 취득이 목표인 경우도 있었지만 식이 문제 극복, 마약중독 회복 등 여러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위로도 해주려 했지만,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하루종일 듣고 있으려니 지치기 시작했다. 함께 수련을 할 때 서로 힘든 이야기를 하는 것까지는 괜찮았지만, 일과 이후에는 나도 내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는 일과 이후 혼자만의 시간을 조금씩 기다리게 되었다. 스페인어 강의를 듣고, 요가강사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기본 산스크리트어를 외우고, 우클렐레를 연습했다.
고시공부 할 때도 한 가지 과목에 오랫동안 집중하지 못하고 50분 단위로 공부 과목을 바꾸어서 공부해왔던 만큼, 한 가지 활동에 싫증을 느끼기 전에 재빨리 다른 활동으로 전환했다. 해변 서점에서 구입한 자아 성찰에 관한 책들도 틈틈이 읽었다. 2배 이상의 집중력을 요하는 영어책 읽기가 지칠 때쯤에는 이북 리더기로 한국어 책도 읽었다. 우클렐레는 유튜브를 보면서 한 곡 한 곡 완성해가는 재미가 있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수련 전에도 연습했다. 같이 수련하는 친구들은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우클렐레 소리를 듣고 하루 하루 나아져간다고 칭찬해주었다.
그렇게 정글 속 요가원에서의 한 달이 지났다. 스페인어는 식당에서 세비체와 과카몰레와 생맥주 정도는 주문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고, 요가자격증 시험을 통과했으며, 우클렐레는 10곡 정도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요가강사 자격증을 받던 날,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우클렐레로 <Can't Help Falling in Love>와 영화 슈렉 OST <Hallelujah> 를 연주했다. 부족한 연주였지만 다같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한 달 동안의 ‘속 근육’ 키우기 프로젝트가 자랑스러웠다. 울룩불룩한 팔 근육 같은 ‘겉 근육’처럼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은 화려하다. 반면 몸 안쪽 깊은 곳에서 관절과 척추를 붙들고 있는 ‘속 근육’은 당장은 눈에 띄지 않지만 ‘나’라는 존재 자체를 지탱해준다. 혼자 있는 시간은 저평가된 주식 같기도 하다. 당장은 특별할 것 없지만 한참이 지나면 2-3배 올라 있는 그런 종목.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을 진작 알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미국 대학원으로 떠나기 직전 환송회날, 당시 근무하던 부서의 과장님은 1,2권으로 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를 선물로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저기 다니고, 이것저것 해보는 것도 좋지만,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보는 습관도 좀 기른다면 한 단계 성숙할 수 있을 거야. 서점 갔더니 여러 버전이 있었는데 가장 예쁜 겉표지로 골랐어. 책꽂이에 꽂아놨을 때 예뻐야 그나마 안 버릴거잖아. 진득하게 앉아서 한 번 읽어봐. 등장인물이 많아서 한 번에 읽어내기 쉽지 않은 책이야”
생각해보면 과장님은 나를 참 잘 간파하고 게셨던 것 같다. 일주일에 반나절 정도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 충분했던 내게 책 읽는 시간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으로 가져갈 짐이 많았지만, 과장님이 주신 <안나 카레니나> 1,2권도 들고갔다. 그리고 책꽂이에 예쁘게 꽂아놨다. 그렇게 일 년 동안 <안나 카레니나>는 내 하얀 책꽂이 속 예쁜 장식품이었다. 그리고 1년 뒤 요가수련을 하면서 마침내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을 깨달았을 때, 보스턴에 돌아와 드디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물론 단숨에 읽어내지 못했고, 아직까지 기억나는 구절은 “행복한 가정은 모두 서로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달리 불행하다”는 첫 문장 뿐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혼자 보내는 시간도 좋아졌으니 왠지 곧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진득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조금의 용기가 더 필요할 뿐이다.
이제는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약속을 끊임없이 잡지는 않는다. 캘린더를 넘기며 약속이 없는 날이 있어도 조금은 덜 불안하다. 저녁에 첼로와 해금 연습을 하고, 필라테스에 가는 일상도 소중하다. 조용히 카페에 앉아 지금처럼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있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