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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Jun 22. 2024

대약진 시기, 고징수와 고비축의 이유

중국현대사(36)-대약진 대실패(4)

대약진 대실패

공업화 추진과

정전협정 직후 북조선 지원


1954년 수재(水災)의 영향으로 양곡 생산이 줄었지만, 중공 정권은 공업화 추진과 정전협정 직후의 북조선 지원을 위해 자국 농민들로부터 890만 톤의 식량을 초과 징수했고, 이로 인해 각지에서 식량난이 발생했다.

광대한 농목(農牧) 지구에서 굶주림으로 인한 부종병과 아사자가 발생했고, 밭가는 소와 양젖 짜는 양을 잡아먹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인민들의 군중성(群衆性) 폭동이 빈발했다.


주요 원인은,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해 준 토지를 (토지소유권 등기의 잉크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집체화를 명분으로 다시 무상몰수하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무보수, 무상 노동을 제공하도록 한 것이었다. 농민들은 자신의 노동의 결과인 수확물 외에도 모든 재산과 농기구까지 징발당하고, 국가 노예와 다름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특히 더 결정적인 요인은, 공업화 추진을 위해서 공산품과 농산품의 가격 차이를 유지하면서 농민과 농촌을 희생시킨 것이고, 또 하나는 1953년부터 실시된 통일 구매 및 통일 판매(统购统销) 제도 하에서 농민들은 자신과 가족 모두의 공동 노동으로 생산, 수확한 식량 작물을, 당과 정부가 규정한 기준에 따라 최소한의 종자와 가족의 생존 식량(口粮)만 남기고 수확한 모든 식량 작물을 정부가 요구하는 대로 또 정부가 책정한 가격대로 공출해야 하는 제도였다. 당시, 양식 외에 육류나 계란 등 단백질 섭취가 어려운 상황에서 농민 1인당 생존에 필요한 생존 식량(口粮) 기준은 1인당 하루 8량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농민들은 하향식으로 전달되는 중앙과 기층 당간부의 요구대로 공량을 납부해야 하는 형식으로 수탈 당해야 했고, 이 같은 과정은 종종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   


1959년 여름 장시성(江西省) 루산(庐山)에서 펑더화이를 비판·숙청한 후에는 대약진의 문제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적인 언급은 더욱 봉쇄되고 금기시 되었고, 그 결과 농민들을 굶주림 속에 굶어 죽게 만드는 야만적 정책을 계속 강행하며 밀어 부쳤고, 그 결과 농촌의 대기근 참상이 갈수록 더욱 심화되어 갔다.



대외 수출과 원조를 위해서

중공이 농촌과 농민을 쥐어짜며 고징수와 고비축을 한 중요 이유와 목적중 하나는 대외 수출과 원조를 위해서였다. 1959년 중국 전국의 양곡 생산은 1957년에 비해 약 2500만 톤 줄었으나, 대외 양곡 수출량은 209만 톤에서 415만 7500톤으로 배 이상 증가했다. 이는 제1차 5개년 계획(一五计划: 1953~1957년) 기간 중 평균 수출량의 2배였다.

이같이 수출량을 대폭 늘린 목적은 공업, 특히 국방 공업 발전 추진과 전쟁 대비를 위한 대량의 외화 조달을 위해서였다. 대표적인 예가 원자탄 제조 공정이다.


또 한편으로, 중국정부는 전문적인 기구를 설립하고 대외 원조를 했다. 전국적 기근이 가장 심각했던 1960년에 중국은 아프리카 가나에 쌀 1만 톤, 콩고에 밀 5000톤과 쌀 1만 톤, 알바니아에 식량 5000톤을 원조했다. 1962년에는 중국의 대외 원조 총량이 609억여 위안에 달했다.

이해에 중국 내 식량 조달을 위해서 캐나다에서 대규모로 밀을 수입해 싣고 중국 국내로 오던 배가 태평양 해상에서 당 중앙의 전보를 받고 항로를 바꾸어 알바니아로 가서 그 밀을 원조물자로 제공하고 온 경우도 있다.



소련에 채무상환을 위해서

농촌과 농민을 쥐어짠 고징수와 고비축을 한 또 다른 큰 이유는 소련에 채무상환을 위해서였다. 정작 소련은 채무상환을 독촉하지 않았으나 마오가 체면을 세우기 위해 미리 갚자고 했다. 저우언라이가 대략 10년 정도면 갚을 수 있다고 했으나 마오가 “지금 상황이 그래도 옌안 시기보다는 좋다. 허리띠를 더 조여 매고, 5년 내에 갚도록 하자”라고 했다.

이는 농민들로부터 더 많은 식량을 징수하자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농민이 굶어 죽는 상황도 감수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

대기근 시기 농민가족

고징수와 고비축을 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1959년 베이징시 시장이었던 펑전(彭眞: 1902~1997년)은 전국 전화 회의에서 “사람이 죽는 것도 성(省)에서라면 한개 성의 문제에 그치지만 베이징에서라면 국가의 문제이다”라고 말하며 각지에서 베이징으로 식량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한 구이저우성(贵州省)에서도 약 5만 톤의 식량을 베이징으로 보냈다.

당시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고 서기처 총서기였던 덩샤오핑도 “한 사람이 굶어 죽는 일이 베이징에서 발생한다면, 쓰촨성(四川省) 산촌에서 발생한 것보다 그 정치적 영향이 훨씬 더 크다. 전체 국면에서 생각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사자는 농촌에서만 발생

수천만의 아사자는 모두 농촌에서만 발생했다. 도시 시민들은 배급받는 식량의 양과 질에 차이가 있기는 했어도 ‘비정상 사망’, 즉, 아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농촌에서도 당 간부나 정부 관원 같은 관리자들은 굶지는 않았다.

이 중에는 대기근 시기에도 농촌지구 시찰을 할 경우에 현지 농민들이 준비한 음식을 먹지 않고 란저우 호텔(蘭州飯店)의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다는 당시 간쑤성(甘肅省) 제1서기 장종량(張仲良), 그리고 거의 매일 호텔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회의 참석자들에게 호텔 식당에서 풍성한 식사를 제공하고 저녁에는 공연·영화감상·무도회 등을 개최토록 한 쓰촨성 제1서기 리징취안(李井泉) 같은 자도 있다.


허난성(河南省) 신양(信阳)지구에서는 관할 지구 내 농촌에서 비정상적으로 사망하는 아사자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숨길 것인가에 대한 대책 논의와 하부 행정 기구에 전달하기 위한 회의를 고급 초대소에서 개최했는데, 약 한 달간 계속된 회의 기간 내내 식당에서는 돼지고기, 닭고기 등 육류를 포함한 풍성한 식사를 제공했고, 오후 회의 때는 간식으로 과일도 제공했다.



슬픈 농민

'사회주의 신중국'의 슬픈 농민

‘사회주의 신중국’ 농민에게는 의무만 있었고 권리는 없었다. 농민은 전민 강철 제련과 공업생산, 그리고 교통시설, 교육시설, 대수리 공정 건설 작업 등에 인력·물자·재산을 무보수, 무상으로 제공하는 수탈 대상일 뿐이었다.

1960년 6월, 국무원 재무판공실은 주요 도시의 식량 사정을 발표하면서, “베이징의 식량은 7일 정도 버틸 수 있고, 톈진은 10일, 상하이는 이미 바닥 상태, 랴오닝성(遼寧省)의 10개 도시는 8일 정도 버틸 수 있다. 만일 도시에 식량이 공급되지 않으면 그 결과는 상상할 수도 없다”라고 보고했다.

이 발표 이후 농촌 농민에 대한 식량 징수는 ‘국가보위를 위해서’라는 명분하에 약탈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1961년 루산 공작회의 이후에 "농촌을 짜내어 중대형 도시를 보위하라"는 방침이 공식적으로 하달된 후에는 농민을 수탈하는 방식으로 도시의 식량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중공의 국가정책기조가 되었다. 그해 중국의 식량 생산량은 1,425억 kg이었다. 이를 모두 농민에게 주어도 4년 전인 1957년 농민이 소비한 식량 총량 1,565억 kg에 미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 192억 kg을 징발해 도시로 보냈다. 식용유와 달걀 등 기타 식품류의 경우도 비슷했다.

1960년에는 모든 계란을 징발하도록 했고 이 중 80%는 수출하고 20%는 내수용으로 주로 도시에 공급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서 당시 국무원 재정부장은 “프롤레타리아계급 독재인데 프롤레타리아계급은 달걀을 먹지 못하고, 노동자·농민 연맹인데 노동자·농민이 모두 달걀을 먹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그럼 계란은 누가 먹었나? 당시에 ‘특수공급 대상자’로 분류된 당의 고급 간부와 고급 지식인들만이 달걀을 먹을 수 있었다.


대약진 기간(1958∼1962년) 중 굶어 죽은 ‘비정상적 사망자’ 수가 적게 추산해도 중국 전국에서 3000만 명 이상이다. 이같이 굶주려 죽은 인민의 실상을 비교적 생생하게 전해주는 주요 사례 중 하나가 당시 허난성(河南省) 신양(信陽)지구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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