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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Oct 29. 2023

마오쩌둥, 징강산으로

박인성의 중국현대사(3)

추수봉기 패배, 마오의 좌절

1927년, 장제스가 발동한 4.12 반공쿠데타에 의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은 중공 자신들의 주체적 무장 역량을 건립해야 한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그해 8월 7일에 중공은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 3진(鎭) 중의 하나인 한커우(漢口)에서 긴급회의인 8·7회의를 개최하고, 향후 혁명 전략의 중점을 무장투쟁과 토지혁명 추진에 둔다고 결정했다. 즉, 국민당과의 합작을 위해 다음 단계로 미뤄두었던 강경노선인 토지혁명전쟁전략 실행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이후 중공이 주동한 무장봉기가 연이어서 발동되었다.


장제스가 4.12 반공쿠데타를 발동한 그해(1927년) 8월 1일에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에서 주더(朱德)와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이 주동하여 중공 최초의 무장투쟁이자 군사정변인 ‘난창봉기(南昌起儀)’를 일으켰다.(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8월 1일이 인민해방군 건군기념일이 되었다.) 이어서 9월에는 마오쩌둥이 1만여 명의 ‘노동자농민무력’(공농혁명군)을 이끌고 후난(湖南) ‘추수봉기’를, 12월에는 펑파이(彭湃), 장타이레이(張太雷), 예팅(叶挺), 윈다이잉(惲代英), 니에롱전(聶榮臻), 예젠잉(叶劍英) 등 난창봉기에 참여했던 지휘관들 대다수가 1927년 12월에 주도한 ‘광저우봉기(廣州起義)’, 그리고 그 다음 해(1928년) 7월에는 펑더화이(彭德怀)와 텅다이위안(滕代遠)이 조직 지휘 후난 ‘핑장봉기(平江起義)’가 연이어서 발동되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두 봉기군보다 우세한 조직과 화력을 지닌 국민당 군대에 진압되었다.


                        난창봉기(南昌起儀) 장면, 회화




       펑더화이 ( 彭德怀 ) 핑장봉기( 平江起義) 기념동상



당시 중공중앙 지도부의 권력과 주요 정책 결정은 소련이 파견한 코민테른 간부와 소련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유학파들이 주도하고 있었고, 이들의 중국혁명 전략은 도시 무산자·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 노동자 운동과 무장봉기를 통한 도시 점령전투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후난성(湖南省) 창샤(长沙) 공격 실패 후, 아군의 객관적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당 중앙의 도시 점령전 전략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다를 바 없는 군사적 모험주의라는 점을 절감했다. 따라서 혁명 역량을 보존하고 생존하기 위해 일단 산간 오지로 들어가 토비들의 생존 전략과 혁명전략을 결합시키자고 결정했다. 마오의 특징이자 강점인 실천 속에서 해답을 찾는 방식 중에서 가장 선명한 결정이었다 하겠다. 이후 마오는 실천과정을 통해서 혁명 추진의 중점을 농촌과 토지혁명투쟁에 두어야 하고, 그러한 활동 수행을 위한 혁명 근거지를 국민당군과 군벌의 세력이 취약한 산간 오지와 농촌지역에 구축해야 한다고 결정하고, 그러한 구상대로 실행했고, 실천과정을 통해서 부단히 피드백과 전략의 수정, 보완을 해 나갔다.


이미 마오는 후난성(湖南省) 농촌에서의 활동경험을 기초로 줄곧 당의 혁명 전략은 농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었 다. 장제스로부터 4·12 반공쿠데타 기습공격을 받은 직후 중공이 개최한 ‘8·7 긴급회의’에서 마오는 확고한 어조로 “혁명은 손님들을 초대해 식사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革命不是请客吃饭)”라고 풍자를 섞어서 설명했다. 이는 마오가 8·7회의에서 무장 역량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함께 주장한 “정권은 총구로부터 나온다(政权是从仓杆子中打出来的)”라는 말과 함께 농촌 토지혁명투쟁 전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말의 의미는, 농촌에서 토지혁명투쟁을 실행하기 위한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소수인 지주와 부농의 토지를 무상몰수해서 다수인 빈농과 고농(雇農)들에게 무상분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농촌인구의 절대다수를 점하는 빈농과 고농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농촌 마을의 깡패와 불량배 건달들까지도 포섭, 동원하여 지주와 부농에게 폭력을 행사하전략 방침과 행동에 대해 고민이나 주저할 필요가 없다 것이다.


이 같은 마오의 발상과 구상은 1927년에 그가 고향인 후난성 농촌에서 진행한 농민운동 경험을 기초로 정리한 「후난 농민운동 고찰보고」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27년 9월 9일, 마오쩌둥의 지휘하에 후난성 안위안(安源)과 통구(銅鼓) 일대의 탄광과 철도 노동자, 농민 무장 조직 위주로 조직, 구성한 1만여 명의 무장봉기군 대오가 후난성과 장시성 경계 지역인 핑장(平江)에서 출발하여 후난성 수도인 창샤(長沙) 점령을 목표로 3개 노선으로 분산 진군했으나, 도중의 각 행로에서 국민당 후난 군벌 부대의 공격을 받고 참담한 손실을 입었다. 이것이 마오가 주도한 후난 추수봉기이다.



마오쩌둥, 징강산으로

마오쩌둥은 봉기 발동 후 닷새 만인 9월 14일에 원래 병력의 10분의 1 정도인 1 밖에 남지 않은 패잔병 무리를 이끌고 장시성과 접하고 있는 후난성 류양(瀏陽)현으로 퇴각하여 그곳에서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창샤 (長沙) 점령을 포기하기로 결정다. 이어서 9월 19일에 잔여 병력을 류양현 남부 원자스(文家市)에 집중시키고 전적(前敵)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후난성과 장시성 경계에 있는 남쪽 산간 지역으로 이동한다고 결정다. 국민당 군대는 전투력이 월등하고 주요 역량이 도시에 집중해 있고, 반면에 전투에서 패배하여 좌절을 겪은 농민 봉기군 병력은 혁명 열기마저 떨어진 상태였다. 도시 공격은 도저히 승산이 없고 감행할 경우엔 남은 전투력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오가 특히 충격을 받고 실망한 점은 1927년 1월에 자신이 작성하여 당 중앙에 제출한 「후난 농민운동 고찰보고」에서 “혁명 열기가 질풍노도와 같이 폭발하고 있다”라고 표현한 농민들이 무장봉기에 대해 예상외로 냉담하게 반응한 것이었다. 이는 1927년 장제스의 4·12 반공쿠데타 이후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지역에서도 많은 농민운동 지도자들이 살해되고 농회(農會)가 궤멸되는 것을 보고 들은 농민들의 심리가 극도로 위축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창샤를 무력으로 점령한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적의 통치 역량이 취약한 산간 오지 농촌지역으로 이동해서 농촌 근거지를 건설하고 토지혁명투쟁을 통해서 지주와 부농의 토지와 재산을 강탈하여 한편으로는 보급 문제를 해결하고, 또 한편으로는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통해서 농민 군중의 지지를 획득하고 이를 기반으로 토지혁명전쟁을 진행해 나간다는 구상을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마오는 지도를 펼쳐 놓고 후난성과 장시성 경계를 가르는 뤄샤오(羅霄)산맥에 주목했다. 뤄샤오산맥은 후베이, 후난, 장시, 광동 4개 성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북에서 남으로 장시성과 후난성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 산맥이다. 마오는 이 산맥 중단(中段)의 산세가 가장 넓게 펼쳐진 지대를 선정했다.


마오쩌둥의 이 같은 주장과 제안에 대해 “그렇다면, 토비(土匪)가 되자는 거냐? 도대체 토비와 뭐가 다르냐?  사회주의혁명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토비 노릇하자는 거냐?”라며 강력히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단장이었던 위사두(余洒度)였다. 그는 ‘먼저 류양(瀏陽) 현성(縣城)을 점령한 뒤 창샤(长沙)를 다시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마오는 위사두의 주장을 군사모험주의라 비판하며 그를 설득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찬반 의견이 팽팽했다. 결국 가까스로 총지휘를 맡고 있던 루더밍(盧德銘)과 그의 참모들이 마오의 의견을 지지해 주어서 다수결로 힘들게 결정했다.


그렇게 선정한 목적지로 가는 노정도 매우 험난했다. 장시성 핑샹(萍鄕)현 루시(蘆溪)에서는 매복한 국민당군에게 기습 공격을 당해 다시 한번 심한 타격을 입었고, 총지휘 루더밍마저 전사했다. 게다가 이탈자까지 늘어나면서 마오 패잔병 무리는 600여명으로 줄었고 이들의 몰골과 행색은 부랑자 무리와 별 차이가 없었다.


1927년 9월 29일에는, 장시성 용신(永新)현 산완촌(三灣村)에 도착 후 부대를 개편했다. 주요 개편 내용은, 원래의 1개 사(師)를 1개 단으로 축소 개편하고 연대에 당 지부(黨支部)를 건립했다. 또한 각급 사병(士兵)위원회를 건립하고 민주적 관리 제도를 실행하여 정치적으로 장교와 사병의 평등을 실현하고자 했다. 중공 당사(黨史)에서는 이를 ‘산완개편(三灣改编)’이라 부르고 있다.






https://youtu.be/tSTw4bBpJ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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