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을 근거지로 삼고 혁명전쟁을 하던 시기에, 중공은 도시는 매국노, 매판자본가, 부패관료의 활동무대이고 부패와 타락의 상징이라 여겼고, 농민 군중에게도 그렇게 선전했다. 반면에 농촌은 그러한 도시를 타도하기 위해 전쟁 및 혁명을 수행하는 기지이고 사회주의 신중국의 희망이라고 홍보했다. 이는 중공 지도부의 주요 인물 대부분이 농촌 출신이라는 점과도 연관된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한 후 시작된 제2차 국공내전에서 승세를 잡기 시작하면서 농촌지구에서의 유격전만으론 부족해지자 보급병참기지로서 도시의 역할이 중시되기 시작했고, 도시의 지원이 없다면 운동전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이에 따라 중공 지도부의 도시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또한, 중공이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세를 굳힌 3대 전투, 즉, 랴오닝-션양(遼沈)전투, 화이하이(淮海)전투, 베이핑-텐진(平津)전투 승리 후에는 농촌 근거지에서 투쟁하고 생활하던 중공의 간부들이 거주지를 베이징과 각 지방 중심도시로 옮기게 되면서 이들이 모두 도시 시민이 되면서 (전시 전략 측면에서 뿐만이 아닌) 평화시기 생산과 생활 측면에서도 도시에 대한 시각과 인식이 바뀌었다.
중공간부와 보통 인민들에게 혁명의 열정과 공산풍(共産風)의 영향을 받아 농촌에 대한 인상이 낭만적 색채로 치장된 기간이 있긴 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대부분의 인민들은 도농이원구조 안에서 수차례에 걸쳐 수천 수백만인이 농촌으로 하방(下放)되고, 다시 도시로 복귀(回城)하는 경험을 반복, 축적하면서 도시생활과 도시인, 그리고 농촌생활과 농민에 대한 인식과 기억을 선명하게 새겼다. 즉, 도시(城市)는 상등 국민의 신분과 기본적인 생존과 생활을 보장해주는 곳인 반면, 농촌과 농민은 그와 대조되는 하등 국민의 장소와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
도시와 농촌에 대한 이 같은 인상은, 농민 희생과 농업 잉여를 기초로 추진된 도시 공업화 건설, 사회주의 신농촌 건설 구호와 도시 청년의 실업문제가 연관된 “상산하향(上山下乡)운동”(중공이 대약진과 문화대혁명 시기에 도시의 지식청년들에게 산으로 가고(上山), 농촌으로 가서(下鄕) 농업생산에 종사할 것을 장려한 운동), 그리고 도농이원 사회구조 속에 도시호구(城市戶口)를 가진 시민에게만 제공된 배급경제하의 각종 생활 및 복지혜택과 그에 따라 형성된 시민자격과 신분에 대한 심층 의식형태를 기초로 했다.
농촌호구와 도시호구를 구분하는 호적제도는 농촌과 도시 간의 인구유동을 제한하는 것 외에 도시에 각종 혜택을 편향적으로 제공했으며, 도시주민에게만 주택·식량·부식·교육·의료·취업·보험·노동 등 각 방면의 복지 제공을 보장하는 제도적 근거가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식량생산과 공업화 추진을 위한 농업잉여 확보를 위해 농민을 농촌에 잡아두고 수탈하기 위한 기제(機制)로도 작동되었다.
중공은 농민을 기초로 혁명에 성공하여 대륙의 권력을 잡았으나, 혁명 이후 치국(治國) 단계와 국가 현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는 농민과 농촌의 희생을 요구했다.
당면한 농민공과 삼농(三農: 농촌·농업·농민) 문제의 근원은 중공이 채택 고수하고 있는 공업화와 부국강병 정책기조를 도농이원구조 하에서 농민에 대한 수탈과 희생에 두고 있는 데에 있다. 농민은 도시주민이 누리고 있는 복지제도나 사회보장제도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수시로 도시의 공업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굶주림 속에서도 더 허리띠를 조이고 국가와 집체(集體)에 더 많이 상납하라는 독촉을 받았다. 상징적인 예를 들면, 소위 “3년 곤란시기”에 발생한 대규모 아사자 등 “비정상 사망자”의 대부분이 양식을 직접 생산하는 농촌의 농민들이었고, 직접 양식을 생산하지 않는 도시 주민들 중에는 아사자가 거의 없었다.
당시 호적제도는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지 못하게 막았고, 그 결과 “사회주의 신중국”의 대다수 농민들은 농촌에서 속수무책으로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각주
“3년 곤란시기(三年困难时期)”란 1959~61년 기간중 대약진(大跃进)운동과 농업을 희생하고, 공업발전을 추진하면서 초래된 전국적인 식량부족 상황에서 중국 전국에서 약 3000만명이 “비정상 사망”한 시기를 가리킨다. 개혁개방 이전 시기에 중국관방자료에서는 기황(饥荒)의 원인을 자연재해로 돌리기 위해 이 시기를 “3년 자연재해(自然災害)시기”라 했으나, 개혁기에는 “3년 곤란시기”라 부르고 있다.
참고: 박인성외, 중국경제지리론, 2021, 한울아카데미, 544-5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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