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42)-1959년 루산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는 커칭스(柯庆施), 천보다(陳伯達), 캉셩(康生), 그리고 뒤늦게 루산에 올라와 가세한 린뱌오(林彪) 등의 집중적 비난과 공격을 받았다.
펑더화이는, 처음에는 분기탱천하여 반박도 하고 항변도 했으나 (마오에게 설득 임무를 부여받은) 예젠잉, 니에롱전 등 옛 전우와 동지들의 계속된 설득과 호소에 결국 자아 비판을 수용했다. 그러나 직설적이고 격정적인 성격의 펑은 마오쩌동의 처사에 대한 불만을 억제하지도 숨기지도 못했다.
회의가 끝나고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던 그때에 펑더화이가 마오쩌동의 자리 앞으로 와서 불만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주석, 참고하라고 보낸 편지를 왜 인쇄해서 배포했습니까?”
그러자 마오가 순간적으로 당황하면서 펑더화이에게 대꾸했다.
“너도 인쇄해 배포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궁색한 대답이었다.
당시의 심정을 기록한 펑의 수기에 의하면, 그는 치밀어 오르는 화와 감정을 억제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고 한다. 펑더화이의 직설적인 성격은 회의장에서 나가다 만난 마오쩌뚱과 나눈 대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마오보다 먼저 회의장 밖으로 나와서 내려가던 펑더화이가 뒤돌아보다가 회의장에서 나와 펑의 뒤쪽에서 내려오던 마오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마오가 소리쳤다.
“펑총, 우리 얘기 좀 하자.”
그러나 펑더화이는 얼굴이 상기된 채로 눈을 치켜뜨고 마오를 한번 노려본 후에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면서 외쳤다.
“얘기는 무슨 얘기를 합니까? 뭐 좋은 이야기도 아닐 텐데.”
마오가 당황하고 멍한 표정으로 다시 펑더화이에게 외쳤다.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도 이야기 좀 하자.”
“무슨 얘기를 합니까, 좋은 이야기도 아니라면서.”
펑더화이는 이번에는 걸음도 멈추지 않은 채로 그렇게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그대로 내려가 버렸다. 그때 마오의 옆과 뒤에는 뤄뤠이칭(羅瑞卿, 1906~1978년), 커칭스, 타오주(陶鑄, 1908~1969년), 왕런중(王任重, 1917~1992년) 등 당 중앙의 수장들과 경호대장 리인차오(李銀橋, 1927~2009년) 등이 함께 내려오던 중이었다.
마오는 매우 기분이 상했다. 아마도 이것이 원래 회의가 끝난 후 산에서 내려갈 준비를 하려던 계획을 변경해, 중앙 판공청에 루산에서 계속하여 중공 8기8중전회를 개최할 것과 그때까지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있던 중앙위원들을 급히 루산으로 소집하라고 지시하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마오의 성격 중 두드러지는 특성 중 하나는, 자신이 받은 상처나 원한을 결코 잊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에 펑더화이는 성격이 불같고 고집이 세긴 했으나 (마오와 같은) 뒤끝은 없었다. 아무튼 당시에 펑더화이가 그같이 직설적으로 감정을 표출한 것은 매우 큰 실수였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한편, 린뱌오는 루산회의 초기에는 신병 치료와 요양을 위해 휴가를 신청하고 참석하지 않았으나, 펑더화이 숙청을 위해 마오가 지시한 중앙위원회의 소집통지를 받고 루산에 올라와서 마오쩌뚱을 만난 후 자신에게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린뱌오는 광저우 황푸군관학교 4기 출신으로, 공산당 입당 후 항일전쟁과 1, 2차 국공내전 중에 국민당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특히 일제가 패주한 후 진행된 2차 국공내전에서는 만주지구에서 인민해방군 동북야전군을 지휘하면서 랴오닝·션양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1948년 8월에는 만주지구 토지의 97%, 인구의 86%를 점령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래서 린뱌오는 ‘전쟁 귀신’이라고도 불렸다. 인민해방군 지휘관 중 린뱌오에 비길 만한 장군은 펑더화이와 쉬샹첸(徐向前, 1901~1990년), 그리고 소수민족인 동족(侗族) 출신의 쑤위(粟裕) 정도였다.
펑더화이의 군부 내 계급과 위상은 줄곧 린뱌오보다 위에 있었다. 섬서·간수 지대에서 펑더화이는 사령(司令), 린뱌오는 부사령(副司令)이었다. 또 그 후에 펑더화이는 팔로군(八路军) 부총지휘(副總指挥), 린뱌오는 팔로군 소속 115사 사단장(師長)이었다. 린뱌오는 평소에 격렬한 전투에 대담하게 정면으로 임하는 펑더화이를 존경하고 흠모해 왔다. 펑더화이는 린뱌오보다 나이도 많았고 줄곧 중앙 홍군의 지휘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후난성 핑장봉기를 주동·지휘했다. 홍군 초기에, 특히 장정 중에는 펑과 린 두 사람이 상호 협력하여 군대를 지휘한 적도 적지 않았다.
장정 기간에 홍군의 투청(土城) 전투 후 후이리(會理) 회의 전에 린뱌오는 마오쩌뚱 지휘하에서 아군의 희생이 너무 큰 것을 보고, 펑더화이에게 그가 전체 홍군을 지휘할 것을 제안한 편지를 써서 보낸 적이 있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오가 격노했다. 1959년 루산에서 그 편지 건이 다시 거론되었을 때 린뱌오는 공개석상에서, 그 편지는 자신이 개인 생각을 썼고 펑더화이와 전혀 관계없었다고 발언했다. 펑은 이때 감동을 받았고, 숙청당한 후에 심문받으며 쓴 자신의 자술서 안에도 그에 대한 소감을 쓴 바 있다.
중공 10대 원수 중 하나이고, 원자탄 개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지휘했던 니에롱전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정권이 공고해진 후, 황제와 같은 지위에 있던 마오쩌뚱에게 직언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펑더화이와 린뱌오 두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성격, 사고방식, 행동은 매우 대조적이었다. 항일전쟁 시기에는 두 사람 모두 팔로군이 오직 유격전만 하면서 군사력을 보존해야 한다는 마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린뱌오는 1937년 9월, 중국군이 최초로 일본군 1000여 명을 섬멸하며 승리한 ‘핑싱관 전투’를 일으켰고, 이어서 펑더화이는 1940년 8월, 총병력 20만여 명 규모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일본군 5만여 명을 사상시킨 ‘백단대전’을 일으켰다. 이 중 백단대전은 대규모 전투로 전장의 범위가 넓어서 중공 측의 피해도 컸으므로, 전투력 보존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던 마오쩌동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마오쩌동은 고뇌 끝에 항미원조 파병을 결정하고, 파병 총사령관에 원래 린뱌오를 임명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린뱌오는 마오의 면전에서 강하게 출병 반대 의사를 표시했고, 신병 치료를 이유로 소련으로 요양을 가버렸다. 그러나 당시 서북군구 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는 린뱌오와는 대조적으로 “미국과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지금 붙는 게 좋다”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마오의 제안대로 항미원조 지원군 총사령관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중조(中朝) 국경선인 압록강 변까지 밀고 올라온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미군을 서울 남쪽으로 밀어내고(1951년 1·4 후퇴), 치열하게 밀고 밀리는 공방전 끝에 정전(停戰)협정을 이끌어내는 전과를 올리고 개선장군으로 귀국했다.
린뱌오의 개성도 마오쩌동이나 펑더화이 못지않게 매우 강했다. 특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린뱌오는 특히 말수가 적고 과묵했다. 그가 중공의 당 간부 교육기관인 옌안 당교(黨校)로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강의 요청을 받고 가서 교육생들에게 “자본주의는 소수만이 돈을 벌고 공산주의는 모두가 돈을 번다. 강의 끝” 하고 강의를 끝냈다는 일화도 있다.
마오쩌동에 의해서 후계자(接班人)로 거명되기 전에 개인적 자리에서는 대약진에 대해서 마오에게 “공상에 기대서 뭘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1959년 여름 루산에 온 후에도 펑더화이의 편지 「만언서」에 대해서 처음에는 “내용은 맞는 말이지만 좀 조급했다”라고 말했으나, 마오와 면담한 이후에는 태도를 바꿔서 펑더화이를 음모자, 위선자, 야심가라고 비판했고, 특히 루산에서 내려와 베이징에서 속개된 군사위원회 회의에서는 펑더화이의 원명 ' 彭得华 '를 들먹이면서 야심가라고 지적했다. 즉, 스스로 지은 이름부터 전체 중화(华)를 득(得)하겠다는 뜻이라는 것이었다. 그후 마오쩌뚱에 의해 후계자로 거명된 후에는 더욱 완전하게 태도가 달라졌다. 다시는 마오에게 말대꾸하거나 맞서지 않았고, 당시의 선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마오 앞에서는 항상 선생님 앞의 모범적인 제자처럼 행동하면서 겸손한 웃음을 달고 있었고, 마오쩌동 어록을 흔들면서 “4가지 위대(四个伟大)”와 “천재(天才)”를 입에 달고 다녔다. 이런 측면에서 린뱌오의 성격과 처세술은 펑더화이와는 상반되고 대조되었다.
린뱌오(林彪: 1907~1971년)는 1907년 후베이성 황강현(黄區縣) 후이롱진(回龍鎭) 린자따완촌(林家大灣村)에서 출생했다. 마오쩌뚱(1893년생)보다 14살, 펑더화이(1898년생)보다 9살 아래이다. 19세 때인 1926년 11월에 황푸 군관학교를 4기생으로 졸업했다. 황푸 군관학교 재학 중 공산주의 청년단(共靑團)을 거쳐서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 3연대 중공지부 서기를 연임했다. 광동성 광저우에서 후베이성 우한(武漢)으로 와서 국민혁명군 제4군 예팅 독립단 소속 초급 장교로 북벌전쟁에 참여했다.
1927년 제1차 국공합작이 와해된 후에는 난창봉기(南昌起義), 1928년 후난봉기(湖南起義)에 참가한 후, 주더를 따라 징강산에 들어갔다. 그 후 전투마다 공을 세우고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1932년 3월에는 25세 나이 때 홍1군단 총지휘(군단장)가 되었다. 이후 1934년 10월부터 시작된 중앙 홍군의 장정(長征)에서는 초기에 국민당군의 4겹 봉쇄선을 돌파하는 공을 세웠고, 이후의 장정 과정에서도 츠수이(赤水) 전투, 진사강(金沙江) 도하작전, 따두하(大渡河) 도하작전, 루딩교(瀘定橋) 탈취 등 중요한 전투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홍군의 전투력 보존에 결정적 공을 세웠다.
항일전쟁 시기에는 팔로군 115사 사단장으로 중국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최초로 승리를 거둔 ‘핑싱관 전투’를 지휘했다. ‘해방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제2차 국공내전 시기에는 동북야전군 사령 등 직책을 맡고 랴오닝·션양 전투(遼沈戰役), 베이핑·톈진 전투(平津戰役) 등 중대한 전투를 지휘하여 국민당 군대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전쟁의 천재’, ‘전쟁 귀신’이라고도 불렸다.
중화인민공화국 출범하고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가 숙청된 뒤 국방위원회 부주석, 국방부장,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등 직책을 역임하면서 군부를 장악했다. 그는 배후에서 ‘문화대혁명’을 지원했고, 중앙 권력 무대에서는 마오쩌뚱 다음의 권력자뿐 아니라 후계자로 승승장구했다. 린뱌오는 마오가 홍위병들이나 군중 앞에 나서기를 즐겨하는 걸 알고 대규모 군중대회를 조직하고 마오를 수행하고 다녔지만, 정작 본인은 즐거워하지 않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힘들어했다. 밖에서 마오를 수행하고 다닐 때에는 ‘4개 위대(四个伟大)’를 입에 달고 외치고 다녔지만, 자신의 거처인 베이징의 마오자완(毛家灣)에는 마오쩌뚱의 초상화조차 걸어놓지 않았다.
결국에는 마오쩌뚱에게 토사구팽되어 숙청 대상이 되었고, 1971년 9월 13일, 쿠데타 기도가 실패한 후 아내 예췬(叶群), 아들 린리궈와 함께 소련으로 탈출을 기도했으나 타고 가던 군용 비행기가 몽골 운드르한(溫都尔汗) 초원에 추락해 시체로 발견되었다. 린뱌오가 아들 린리궈와 쿠데타를 계획하면서 만든 강령에는 “간신배들을 제거하고, 신정(新政)을 실시한다. 문화혁명을 중지하고, 현재의 강국빈민(强国貧民) 정책을 강국부민(强国富民) 정책으로 바꾸겠다”라는 내용도 있었다.
당시 루산에서의 회의 분위기에 대해서 펑더화이가 루산에서 내려온 직후에 조카 펑치차오(彭起超)와 대화 중에 말한 바 있다.
“주석이 한마디 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야말로 떼거리로 달려들어 공격을 했다.”
린뱌오가 가족과 함께 국외 탈출을 시도하다 몽골 인민공화국 초원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죽은 1971년 ‘9·13 사건’ 발생 이후, 그다음 해 1월 8일에 펑더화이 전담 조사조가 수감 생활 중이던 펑더화이에게 린뱌오 반당(反黨) 사건을 통보하고, 린뱌오의 문제를 폭로하고 비판하라고 강요했으나 펑더화이는 적당히 모호하게 얼버무리며 린뱌오를 비판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다. 즉, “40여 년 전 일이라 잘 생각나지 않는다.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라고 했다. 6월에 조사조가 다시 펑더화이를 불러내서 린뱌오와 가오강이 만주지구에 있을 때의 상황에 대해 진술할 것을 요구했을 때에도 “나는 당시에 만주에서 그들과 같이 일하지 않아서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 그래도 조사조가 며칠간 계속 불러내어 더욱 강력하게 핍박하며 요구하자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좋다, 가오강, 린뱌오 모두 반혁명이고, 나 펑더화이도 그렇다.”
중국현대사 #현대중국의이해 #팽덕회_펑더화이 #임표_린뱌오 #펑더화이와린뱌오 #루산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