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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매장(软埋)’ 작가 팡팡(方方) 인터뷰

소설 ‘연매장(软埋)’-3

by 탐구와 발언

소설 ‘연매장(软埋)’ 작가 팡팡이 중국내 매체와 인터뷰한 내용 소개. 인터뷰는 이메일로 진행되었다 하, 번역 정리 과정에서 삭제와 약간의 편집을 했음.


问:당신은 소설후기중에 당신의 가족 역사의 한부분을 언급했다. 당신 가족들의 토지개혁중의 경력을 말해 줄 수 있나? 당신들의 가정 기억도 연매장(软埋)되었나? 토지개혁에 관해, 당신은 상관 역사자료를 검색 열람했는가?


答:소설내용과 나의 가족은 사실 어떤 관계도 없다. 내가 소설 한편을 쓰고 난 후에, 100년 사회 동탕과 변혁중 한 가족의 운명에 대한 것을 한편 쓰고 싶다 생각했다. 그래서 고향집에 가서 둘러 보았다. 왜냐하면, 나의 부모의 가정은 매우 대표성이 있다. 부모님이 젊었을 때 외지로 나와서 공부하고 일했기 때문에, 나는 한번도 고향집에 가보지 못했다. 소설을 출판사에 넘기고 난후에, 처음으로 고향집에 갔고, 그곳 시골에서 과거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을 듣게 되었다. 수십년이 지난 터라, 지난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이는 오직 두명의 사촌 오빠뿐이었다. 후기에서도 썼듯이 소설의 원형 인물은 나의 친구의 어머니이다. 단, 그것은 오직 약간의 흔적일 뿐이다. 바로 친구 모친이 말한, “연매장(软埋)” 두 음절에 충격을 받은 후, 집필중이었던 작업을 내려 놓고,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1980년대초 대학을 졸업한 후 방송국에서 일했고, 자주 시골에 가서 다큐멘타리를 촬영했다. 그후에 다시 하향하여 비물질문화유산 조사를 했다. 이 같은 경력은, 나에게 시골에서 수많은 주인없는 대저택, 혹은 대지주가 살았던 구식 장원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떤 저택은 1-2세대 후손들이 한 구석에 살고 있었고, 대부분 몰락하여 빈곤한 자들이었고, 더욱 많은 경우에는 주인조차 없었다. 호기심에 촌민에게 물어보면 그들도 나에게 약간의 당시의 과거사 조각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게 많이 보고 많이 들었고, 마음 속에 묻어둘 수 있었다.

또한, 소설에 쓴 쓰촨동부(川东)지구에도 가보았다. 토지개혁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자료를 검색하고 읽을 수 있었다. 토지개혁과 연관된 수많은 자료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어찌되었건 이는 이미 여러 해가 지나버린 일이다. 게다가 이와 같이 중국사회의 진전에 영향을 끼친 큰 사건을 사람들은 거의 잊어 버렸다. 현재는 이 책 소설 '연매장(软埋)'을 판매금지해서 오히려 왕성하게 퍼지고 있는 데, 이것도 나를 매우 놀랍게 한 것이다. 물론 내가 읽거나 찾아낸 게 사실과 사연 스토리가 응당 책을 통해 퍼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다. 나는 적지 않은 역사 배경 소설을 썼고, 나의 글쓰기 습관은 집필 시작 전에 꼭 관련자료에 대한 작업을 충분히 하는 것이다. 나는 현장조사도 했다. 거의 모든 소설이 그렇다.


问:'연매장(软埋)'은 토지개혁을 부정하여 논란을 일으켰으나, 소설 중에는 토지개혁 역사가 정면으로 출현하지 않고, 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노부인의 기억중에 재현된다. 그렇다면 토지개혁 소설 보다는, 토지개혁기억 소설이라 부르는 게 더 낫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答: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소설에는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논의가 없고, 심지어 반대한다는 경향조차 없다. 역사 사건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나의 또 하나의 글쓰기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역사과정중의 사건들은 종종 매우 복잡한 배경과 매우 특수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시비는 한 작가가 평가 판별할 일이 아니다. 문학은 인학(人学)이라 생각한다. 나의 소설은 이러한 역사진행과정중에 충돌하고 운명을 바꾼 사람들에 주목한다. 사회사건은 단지 인물의 배경일뿐이다. 심지어, 이 소설 내용으로 돌아가면, 오히려 일종의 역사와 화해하는 태도가 훨씬 더 많다. 이 같은 화해는 망각한 자에 대한 양해로 표현했다. 필경, 이것은 이미 반세기 이상 지나간 역사이고, 그와 상관된 그 세대의 사람들은 모두 이미 사라졌고, 남아있는 후대들 또한 이러한 것들을 놓고, 밝은 곳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생활을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망각할 수 있다고 본다. 단, 사회 엘리트들은 응당 이 일을 기록해 두어야 한다. 한 사회의 중요 사건을, 시간의 흐름 속에 연매장해 버릴 수는 없다. 우리는 기록해야 한다. 개인은 기억이 필요없다고 할 수 있으나 역사와 민족에게는 필요하다. 기록의 목적은 역사가 거울이 되어, 향후에 도래할 사회 진보를 위해 참조할 문본(文本)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问:그렇다면, 당신은 토지개혁(土改)의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사실 이 소설이 토지개혁을 정면으로 다루지도 않았는 데, 왜 극좌의 분노와 대비판을 야기했는 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答:나는 원래 토지개혁(土改)에 대하여 정면으로 묘사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오직 그러한 배경하에 한 사람과 일부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쓰고 싶었다. 토지개혁 자체에 관해, 나의 일관된 관점은, 신정권이 건립되면, 토지개혁을 진행하는 것 또한 아마도 필연일 것이라는 것이다. 경자유전(耕者有其田)을 실현하고, 토호와 신사를 억제하고, 빈부를 균일하게 하는 것도 대략 사회 이상이다. 단, 어떻게 개혁해야 하나? 이 정도로까지 잔혹할 필요가 있는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어야 했나? 왜 그랬나? 한 사람의 인본주의자로서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도 명백하다. 기실 이 소설 중의 인물의 운명이 상당히 비참하지만, 온화한 관점의 소설이다. 단지 토지개혁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

작가 팡팡

나는 극좌의 포위공격이 야기된 이유는, 극좌 자신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파벌이건 일단 극단을 향해 가면, 어느 때이건 간에 공격목표를 찾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을 공격하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서로 더욱 더 심하게 공격할 것이다. 그들은 오직 타인을 공격하는 그런 정황에서만, 비로소 일치단결할 수 있다. 물론, 배후에 책동자가 있을 수 있다. 나도 작품 심사나 기타 자문활동과정에서, 일부 사람들에 대해 비평한 적이 있는 데, 그 당사자들도 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나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극좌 정서를 이용해서 나 개인에 대해 보복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명의 퇴직 고급관료가(전 중공 중앙조직부 부장 张全景, 해방군 상장 赵可铭, 전 중공중앙선전부연구실 주임 刘祖禹) 거의 동시에 소설을 보고, 또한 각자 동시에 내용과 글의 분위기가 대체로 비슷한 문장을 썼다는 걸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때로는 어떤 일들이 보기에 매우 복잡하게 보일 때가 있지만, 조금 더 수색하고 흔적을 추적하면, 단번에 어찌된 건지 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내가 죄를 지은 어떤 한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는 그들의 동지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고, 또한 극좌의 “인터넷 신문화혁명(网络新文革)”도 그들의 존재감을 나타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므로, 공격 대상을 찾아야 했을 수도 있었고 해서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 주제는 아마도 그들의 의도에 딱 맞을 것이다. 이리하여, 모든 극좌의 골간 인물들 거의 전체가 출전하였다. 문장을 쓰지 않은 자들도, 전달을 통해 태도를 표명했고, 그 기세가 정말로 매우 컸고, 용어의 격렬함과 험악함도 매우 놀라울 정도이다. 보통의 저층 백성부터 베이징의 고급관리까지 모두 이 소설, 관점이 이처럼 온화한 소설을 비판한 것은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이고,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그들은 제1편 문장부터 시작하여, 작품이 아니라, 작가인 나를 겨냥했다. 그들이 들춰낸 죄상은, 과거라면 모두 참수 죄이고, 현재에도 읽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한번 그리고 두번, 다시 세번, 관부에 보여주었다. 이 사람의 소설은 당신들을 반대하고 있다. 당신들은 응당 그녀를 엄중 처벌해야 한다고. 안정 유지를 위해 관방은 분명히 그들의 기획과 충동에 따를 것이다.


问:자오커밍(赵可铭)은 “여전히 문학은 계급투쟁 또는 정치선전의 도구라 여긴다.”고 했다. 이 같은 논조의 출현은 사람들에게 '문화대혁명'을 떠올리게 한다. 당신은 왜 오늘날 이런 비판과 논조가 여전히 출현할 수 있다고 여기나?

팡팡

答:우리는 대학 시절에, 후베이성(湖北省)의 정기 문학 출간지《장강문예(长江文艺)》 잡지사와 연합하여 ‘문학은 계급투쟁의 도구인가?’ 라는 질문을 주제로 토론한 적이 있다. 대략 1970년대말 혹은 80년대 초였다. 나의 동학들 대부분은 “공구론”에 대해 견결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나갔다. 나는 이것은 이미 일찌감치 해결된 문제이고 다시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당연히 계급투쟁의 도구가 아니다. 비록 가끔 도구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그 본질은 어떤 도구로도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문혁 스타일의 문장을 보고, 나는 매우 놀랐고, 정말로 매우 오래 전의 물건을 다시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상하이 화동사범대학(华东师大) 첸구롱(钱谷融) 선생이 “문학(文学)은 인학(人学)이다”라고 했다. 나는 이 관념에 적극적으로 찬동한다. 한 작가에게 필히 정치가나 혁명가가 되기를, 그들의 글쓰기가 정치 또는 혁명을 위한 것이 되게 강요해선 안되고, 또한 작가에게 어떤 규정이나 상급의 요구에 따라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면 안된다. 만일 역사상 과거의 작가가 모두 그렇게 썼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디서 이렇게 많은 읽어볼만한 문학경전들을 볼 수 있었겠는가? 문학은 보다 많은 경우에 일종의 개인 표현이다. 무수한 개인의 표현이 모여서, 비로소 한 시대를 표현한다.

'软埋' 중국어판 표지

问:소설 '연매장(软埋)'은 한편으로는 민간문학상 ‘루야오문학상(路遥文学奖)’을 받았고, 또 한편으로는 좌파 인사 장쵠징(张全景), 자오커밍(赵可铭) 등으로부터 포위공격을 받았다. 당신은 중국이 당면한 이 같은 기괴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이 같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答:나는 상을 받고 안받고 여부는 개의치 않는다. 나는 그 이전에 루야오상(路遥奖)이라는 게 있는 지도 몰랐다. 단, 일부 비판의 목소리 중에서 평가위원들이 그 상을 나에게 주어서 매우 감동, 감사했다. 이 같은 감동, 감사는 상을 받은 것보다 일종의 공감과 인정때문이다. 이 일은 나로 하여금 최소한 문학계에 나와 같은 관점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극좌의 포위공격에 대해 처음에는 의외라고 느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많은 작가가 모두 공격 당했었기 때문이다. 천중스(陈忠实), 모옌(莫言), 위화(余华) 등도 모두 공격을 받았었다.

나는 문혁과 개혁개방을 완정하게 겪은 사람이다. 1980-90년대에 우리는 줄곧 반좌(反左)였고, 그 강도가 매우 컸다. 사회에 대한 영향이 매우 깊었다. 매우 긴 시간 동안, 극좌 모두에게 시장이 없었다. 극좌분자는 당연히 사회와 대중으로부터 미움과 혐오를 받았다. 물론, 문혁 옹호자도 있을 것이나,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고, 그들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마당과 기회가 없었다. 현재의 극좌 인사는 기실 문화혁명 시기의 "좌파"와도 다른 사람들이다.

개혁개방은 중국사회가 곤경을 뚫고 나갈 수 있게 했고, 경제적 비약을 하게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저층사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모두가 대가를 지불했다. 비록 사회 전체가 부유해졌고, 생활이 그 이전에 비하면 모두 개선되었지만, 빈부격차의 확대, 일상생활의 곤란, 예를 들면, 병원진료(看病), 주택구입(买房), 교육, 취업 등 일련의 문제와, 다시 그에 더해, 상층에서 부패한 탐관과 영원히 나태한 관료 류 등이 출현했다. 개혁중의 과오와 수많은 후과는 그들의 책임과 부담이 되었다. 국가는 이 같은 과오를 장기간 수정하지 않아서 깊은 실망감을 초래했다. 기층 인민들은 목소리를 내기가 매우 어려웠고, 그들의 요구도 자주 무시되었고, 심지어 그들의 쌓인 정서조차 위로받지 못했다.

인터넷은 함께 모여서, 서로 지난 일들을 돌아볼 수 있게 했고, 그때 함께 가난하고, 함께 고생했던 청빈 세월을 그리워하는 것, 이것이 이미 그들의 정신 위로제가 되었다. 극좌들은 바로 이 같이 실망감이 깊은 일부 사람들을 이용했다. 개인간의 만남은, 그들을 매우 쉽게 정서화하여, 누군가 선동을 하면 선동자를 그들의 대변인으로 믿고 지지했다. 이 같은 한 무리 군중의 수적 규모가 매우 크다. 아직까지도 우리의 정부는, 그들의 생활상태를 개선 변화시키고, 또한 자신의 관념을 갱신하게 하므로써, 현대생활에 융입하게 할 더 좋은 방법을 여전히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나는 현재의 대치를 녹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민생을 중시하고 민생을 개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매우 긴 개혁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问:1942년 5월 2일, 마오쩌뚱(毛泽东)이 옌안(延安)에서 개최한 문예좌담회가 중국문학 창작의 지도사상이 되었다. 2014년 10월15일, 중공중앙 총서기 시진핑(习近平)이 베이징에서 문학공작좌담회를 개최 주재했다. 작가로서 당신은 이 두개의 좌담회가 조성한 영향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方方:첫번째 회의중의 “옌안강화(延座讲话)”는 나 같은 연령대의 사람은 문혁기간중에 모두 배웠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 강화는 중국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두번째 회의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국내에서 적극분자가 아니다. 비록 내가 후베이(湖北) 작가협회 주석을 맡고 있지만, 중국작가협회에서는 여전히 주변 인물이다. 게다가 나는 의례적 회의를 싫어한다. 이 좌담회에 참가자격이 없는 것도 아마 쌍방 모두 좋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첫번째 혹은 두번째 좌담회를 막론하고, 모두 고층 영도자의 문학에 대한 애호와 중시를 드러내고 있다. 물론 그들의 관점이 중국 문학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영향은 지대하다. 이런 영향은 간단한 문자로 어떤 방면 등등에서라고 진술할 수 없고, 또한 매우 정교한 어휘로도 어떤 판단을 하기도 어렵다. 아마도 일종의 종합적인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진정한 작가라면 몇 명의 영도자가 중요한 말을 했건 건에 여전히 자신 내심의 필요에 의거하여 자신의 모든 작품을 스스로 완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https://youtu.be/JcuCFpgr_E8

#연매장 #软埋 #토지개혁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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