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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Nov 02. 2023

마오, 징강산 도착, 근거지 구축

박인성의 중국현대사(4회)

마오쩌뚱, 징강산 도착

1927년 10월 , 마오가 패잔병 무리를 이끌고 후난성(湖南省)과 장시성(江西省)의 경계인 뤄샤오(罗霄)산맥 중간지대에 위치한 징강산(井冈山)에 도착했다. 징강산 지구는 후난성 링(酃)현과 장시성 닝강, 쑤이촨(遂川), 용신 4개 현(縣)이 만나는 지점에 있고 총면적은 약 4000㎢이다. 징강산을 품고 있는 뤄샤오산맥은 광동성 북부의 후난·장시 두 성의 경계에 접한 지역부터 후베이성(湖北省) 남부까지 뻗어 있다. 각 지구별로 지리적 특성을 비교해 보면, 닝강(宁冈)을 중심으로 하는 산맥 중간 지구 부분이 군대 주둔지로서 가장 유리했다. 북부는 그 지세가 진공과 수비 등 군사행동에 불리했고, 또한 지구내 거점 대도시이자 정치도시(政治都會)들과 가까워서 위험했다. 뤄샤오산맥 남부지구의 지세는 북부보다는 좋으나 농민운동 등 군중 기초가 중부보다 못하고 배후의 후난·장시 두 성(省)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중부지구만 못했다. 중부지구에는 1년 이상 경영해 온 군중 기초와 공산당 조직 기초, 그리고 무장투쟁 경험을 쌓은 지방 무장세력이 있었다.


징강산 전경


징강산의 입지조건과 환경

마오는 이곳이 중심 도시로부터 거리가 비교적 멀고 교통이 불편해 국민당 통치 역량이 미약하고, 높고 험준한 산, 울창한 삼림, 몇 개의 좁은 산길을 통해서만 진출입이 가능하다는 위치와 입지 조건을 파악하고 전진·공격과 후퇴·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판단했다. 이는 산적이나 녹림당 패거리의 입지 선정 원칙 및 기준이기도 했다. 이 같은 지리 조건과 함께 이들 현 모두에는 이미 ‘대혁명시기(1924~1927년)’에 공산당 조직과 농민 자위대가 건립되어 있어서 군중 기초가 비교적 좋았고 츠핑(茨坪), 따샤오우징(大小五井) 등지에 모두 농경지와 촌락이 있어서 주위 각 현 농촌을 대상으로 보급투쟁을 하기에 유리하다는 점도 중요한 선정 이유였다.


따샤오우징이란 지명은 크고 작은 다섯 개의 우물이란 뜻으로, 징강산 위의 5개 촌락인 따징(大井), 샤오징(小井), 중징(中井), 상징(上井), 샤징(下井)을 가리킨다. 이는 산봉우리에 층층겹겹 둘러싸인 5개 촌락의 형상이 하나하나 모두 우물(井)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27년 10월 하순, 마오쩌둥이 인솔한 무리가 징강산에 올라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당시에 마오가 거주했던 따징은 5개 취락 중 가장 크고, 츠핑 현성(縣城)으로부터 약 7㎞ 거리이며, 마오쩌둥보다 늦게 징강산에 온 주더, 천이(陳毅, 1901~1972년), 펑더화이 등도 모두 이곳에 거주했다. 현재 따징(大井)의 혁명 유적은 이미 중국의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홍군 병원과 군복 공장 등 따샤오우징의 5개 작은 산촌 안에 있는 혁명 유적들과 함께 ‘홍색 관광상품’이 되었다.


홍색 관광지, 징강산 따징 ( 大井 )


장강산의 토박이 토비 두목들

징강산 지구에는 원래 오랜 기간 동안 녹림당 패거리를 거느리고 토비질을 해 온 패거리와 두령이 있었다. 당시에는 위안원차이(袁文才)와 왕줘(王佐)를 수령으로 하는 두 개 파의 녹림당 토비 무장 세력이 각각 150~160여 명 병력과 60정 내외의 총을 가지고 있었다. 왕줘의 무리는 산 위의 츠핑과 따샤오우징 등에 주둔하고 있었고, 위안원차이의 무리는 징강산 북쪽 산기슭의 닝강 마오핑(茅坪)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북벌전쟁에도 참가했었고 위안원차이는 공산당 당원이었다. 마오의 부대가 징강산에 안착하려면 이들 토박이 녹림당 무리의 동의와 협조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들은 밖에서 굴러온 무리들이 자신들보다 병력 수와 역량이 강해 보여서 감히 공격을 못하고 긴장 속에 경계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원조 징강산 산적 두목, 위안원차이(袁文才)와 왕줘(王佐)


토박이 토비 두목, 설복, 쟁취

이 두 무리의 토박이 녹림당 무리를 어떻게 설복하고 쟁취할 것인가? 마오는 우선 공산당 당원인 위안원차이에 대한 공작부터 시작하고, 다시 그를 통해서 왕줘(王佐)에 대한 작업을 진행했다. 우선 위안원차이 휘하의 병력 수는 160여 명인데 총은 60자루뿐이라는 걸 파악하고, 전적(前敌)위원회 회의에서 위안원차이에게 100자루의 총을 주자고 제안했다. 그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을 주어야 감동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마오의 대담한 제안에 전적위원회 위원들은 우려를 표시했으나 이번에도 마오는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다수결로 자신이 의도한 바 대로 결정을 이끌어냈다.


린자사당(林家祠堂)

1927년 12월 6일, 마오는 닝강 따창촌(大倉村)에 가서 위안원차이를 만났다. 위안원차이는 원래 회의 장소인 린자사당(林家祠堂) 안에 총을 지닌 20여 명을 매복시켜 놓았었다. 그러나 몇 명의 수행원만을 데리고 온 마오의 일행을 본 순간 안심했다. 마오는 회의 중에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劫富济贫)한다”라는 위안원차이 일당의 활동이 혁명성을 지녔다고 치켜세우면서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100자루의 총을 주겠다는 뜻을 밝혔다. 위안원차이는 크게 감동했다.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며 600은위안(銀元)을 지원하겠다”라고 약속했다. 또한 마오의 부대가 자신의 근거지이자 60여 호 규모의 촌락인 마오핑(茅坪)에 후방 의원과 주둔지를 건립하는 것에 동의하고 이웃 녹림당 두목인 왕줘도 설득해 보겠다고 화답했다.


한편, 위안원차이는 마오에게 “이왕에 왔으니 우리와 복은 같이 누리고 곤란이 있으면 같이 마주해야(有福同享,有难同当) 할 것이다. 부상자와 부대의 양식은 내가 관리하겠다. 단, 당신들은 우리 영역인 닝강 밖의 링현, 차링(茶陵), 쑤이촨(遂川) 일대로 나가서 토호들의 재물을 털라”라고 제안했다.


이에 마오가 부상병과 잔류자들을 마오핑에 두고, 자신은 부대를 이끌고 후난성 남부의 링현으로 가서 그곳의 국민당 무장 세력을 제압한 후, 현성에 계속 주둔하면서 지주와 토호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주변 지형과 환경을 익혔다. 이어서 (위안원차이의 요청에 따라) 유쉐청(游雪程), 쉬옌강(徐彦剛), 천보둬(陳伯多) 등 당원을 군사간부로 위안원차이 부대로 파견하여 정치와 군사훈련을 돕도록 했다.


위안원차이를 설복한 후에 마오는 다시 수차례 산으로 올라가 또 한 패거리의 토박이 녹림당 두목인 왕줘를 대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문화 수준이 낮고 단순한 성격의 왕줘는 마오의 말솜씨와 술수에 설복되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마오는 정말 학문이 높은 사람이다. 그와 한 차례 대화하면 10년간 책을 읽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마오쩌동은 위안원차이와 왕줘를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 두 사람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이들이 봉건적 민간 결사(封建帮會) 관례를 따르고 있을 뿐 정치 목표가 명확치 않고 계급 경계선이 명확치 않은 점 등을 지적하면서 설득했다.


1928년 1월 상순에는 왕줘의 요구에 따라 프랑스 유학 후 돌아온 허장공(何長工)을 왕줘 부대의 당대표로 파견하고 부대 개조 업무를 추진토록 했고 부대 안에도 공산당의 기층 조직과 사병위원회를 조직토록 했다. 또한 20여 명의 당원 간부를 파견하여 위안원차이와 왕줘의 부대 내에서 연대장(連長), 대대장(排長), 당대표 등 역할을 분담하게 했고 부대의 정치적·군사적 교양을 제고시켰다. 얼마 후에 왕줘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고 이어서 2월 중순에는 위안원차이와 왕줘의 부대를 공농혁명군 제1사단 제2단으로 정식 편제하고 위안원차이를 단장, 왕줘를 부단장, 허장공을 단 당대표에 임명했다.


토비 대상 공산당 조직 건립과 정치교육

마오쩌둥이 징강산 근거지 건설을 추진하면서 가장 중시한 일은 군대와 지방에 공산당 조직을 건립하는 것과 정치교육이었다. ‘산완개편(三湾改编)’(1927.9) 때부터 군대를 당의 영도하에 두고 각 연대 내에 공산당 지부 건립을 추진했다. 당 지부는 당원에게 3가지 과업을 요구했다. 첫째, 당면한 형세 공부, 둘째, 군중의 상황 이해, 셋째, 신당원의 배양 및 발전이었다. 이후 마오는 자기 부대원들에게 군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 군중을 향해 선전 활동과 조직, 무장, 생산노동 지원을 하면서, 실제 곤란한 문제를 해결해 주도록 했다. 또 의료시설인 ‘홍군의무소’를 설립하고 홍군 주둔지 내 농민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도록 했다. 이것이 ‘실사구시(實事求是)’와 함께 마오쩌둥 전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군중노선’이다.


마오 군대 내부의 공산당 조직 건립과 동시에 지방 당 조직의 회복과 발전에도 집중했다. ‘대혁명시기’에 징강산 부근 각 현에 모두 당 조직이 건립되었고 대부분의 당 조직 책임자는 외지에서 돌아온 학생과 당지 농회(農會)의 핵심 인물이었으나 ‘대혁명’ 실패 후 당 조직의 많은 부분이 흩어져 있던 상태였다. 마오핑에 진입한 날 저녁부터 닝강, 용신, 롄화 등 현의 당원들을 모아서 좌담회를 개최했고, 1927년 11월 상순에 다시 마오핑에서 각 현의 원(原) 당 조직 책임자 회의를 개최했다. 다음 해(1928년) 1월에는 장시성 쑤이촨현 현성 점령하고 전적위원회와 완안, 쑤이촨 두개 현의 현위원회 연석회의를 개최했다. 또한, 군대 내의 일부 정치공작 경험이 있는 간부들을 각 현 농촌 기층으로 파견해서 당 조직 건립 업무를 추진토록 했다. 2월에는 각 현에 현위원회, 또는 특별구위원회나 특별지부를 건립했다.


군대의 임무에 ‘군중(群衆) 공작’ 추가

마오쩌둥이 혁명 동력 창출을 위해 착안한 또 하나의 중요한 조치는 군대의 임무에 ‘군중(群衆) 공작’을 추가한 것이다. 즉, 군대는 전투뿐만이 아니라 군중 공작을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이 마오쩌동은 예로부터 이어져 온 구관념의 속박을 거부하고 풍부한 군중 공작 경험과 독립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실천 과정 중에 만난 새로운 상황과 문제들을 중시하면서, 실제에서 출발하여 대담하게 탐색했다.


https://youtu.be/tSTw4bBpJ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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