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더화이 숙청 과정-박인성의 중국현대사(43)

by 탐구와 발언

1959년 루산에서, 회의 참석자들이 짐을 싸고 산을 내려갈 준비를 하던 날 저녁에 펑더화이가 마오쩌뚱의 거소로 찾아왔다. 마오의 경호를 맡고 있던 경위들도 최근 수일간의 회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기에 펑을 대하는 태도가 평소와 달랐다. 펑더화이를 제지한 후 잠시 기다리게 하고 마오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마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데리고 와!”


펑더화이

경위들과 함께 들어온 펑에게 마오가 소파에 앉은 채로 담담하게 “앉게”라고 말했고, 펑이 (소파 위에는 이론 저론 물건들이 널려있어서 마오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마오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인 후 펑에게 말했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말해보게.”


펑더화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한 가지 요구를 제출하고 싶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당을 위해 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놀면서 밥만 먹을 수는 없으니 중앙이 저를 옌안(延安)이나 후난성 농촌에 가서 농민이 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씨 뿌리고 거두면 국가에 공량(公糧)도 납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오가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그만하자. 보아 하니 자네는 아직도 승복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더 검토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지 않나, 뭘 더 검토하겠나?”

펑더화이가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일어나서 작별 인사를 하고 나갔다. 마오는 일어서지도 않았다.


고집이 세고 굽히기 싫어하는 두 사람의 개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펑더화이로서는 자기 방식대로 마오에게 화해와 협상을 바라는 마음을 표시했으나 마오는 짐짓 이를 차갑게 외면하고 펑이 완전한 굴복할 것요구했다고 하겠다. 또는, 숙청을 결정했으니 그 수순을 밟겠다는 의사 표시로도 볼 수 있겠다.


펑더화이가 가고 나서 경위가 방에 들어와서 찻잔 등을 정리하고 있을 때, 생각에 잠겨 있던 마오쩌뚱이 전화기를 들고 중앙판공청에 지시했다.


“군사위원회에 통지하라. 모레 베이징에서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개최한다. 펑더화이는 비행기에서 내리는 즉시 회의장으로 데리고 와서 계속 비판받도록 하라.”


마오의 지시에 따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의 조직과 펑더화이에 대한 조사 등 구체적 준비는 펑더화이 후임으로 국방부장에 임명된 린뱌오와, 황커청의 후임으로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에 임명된 뤄루이칭(羅瑞卿)이 진행했다. 펑더화이는 회의 시작일 하루 전인 8월 17일, 베이징 난위안(南苑) 공항에서 비행기에서 내린 직후 곧바로 대기 중인 차에 태워져 중난하이 화이런당(懷仁堂)으로 가서 조사를 받고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는 펑더화이 외에 주더도 비판을 받았다. 그 이유는 루산에서 ‘반혁명분자펑더화이에게 동정을 표시했다는 것이었다.


9월 26일 군사위원회가 중공중앙정치국이 결정한 「군사위원회 성원에 관한 통지(关于军委组成人员的通知)」를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공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에 마오쩌동, 부주석에 린뱌오, 허롱, 니에롱전,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에 마오쩌동, 린뱌오, 허롱, 니에롱전, 주더, 류보청, 천이, 덩샤오핑, 뤄롱환, 쉬샹첸, 예젠잉, 뤄루이칭, 탄정(譚政), 군사위원회 일상 업무는 린뱌오가 주관한다.


이와 같이 1959년 루산회의가 끝난 후에 중공 군부 10대 원수 중 서열 2위였던 펑더화이는 중앙 영도(領導) 핵심 대열과 정치 무대에서 퇴출되었다. 서열 1위였던 주더도 마오의 의도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사위원회 부주석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군사위원회 상무위원직만 유지하게 되었다. 서열 제3위였던 린뱌오는 국방부장과 군사위원회 제1부주석 자리를 차지했다.


펑더화이가 중난하이에서 쫓겨나 오가화원(吳家花園)으로 거처를 옮긴 지 3주 지난 10월 21일 새벽, 마오쩌동이 펑더화이에게 직접 전화해서 보자고 했다. 펑더화이가 중난하이 이녠당에 들어서니, 마오쩌동 외에 양 옆에 류사오치, 주더, 덩샤오핑, 천이, 펑전, 리푸춘, 탄전린 등이 앉아 있었다. 펑더화이는 그제야 마오가 안배한 이 자리가 마오와 개인적인 면담이 아닌 중앙 명의로 자신을 부른 것임을 알았다.


마오쩌동은 낡은 검은색 중산복 차림에 얼굴이 수척해진 펑더화이를 보고 목청을 다듬고 입을 열었다. 다음은 마오와 펑더화이의 대화 내용이다.


마오: 우리는 향후 일정 기간 동안 자네의 업무와 학습 문제를 의논했다. 중앙은 자네가 보낸 9월 9일 편지에 동의한다. 몇 년간 공부하는 거 매우 좋다. 매년 일정 시간, 공장과 농촌에 가서 참관·조사하는 것도 매우 좋다. 자네 나이가 많으니 인민공사에 가서 노동할 필요는 없다.

펑: 동의합니다.

마오: 어떻게 공부하려고 준비하고 있나?

펑: 주로 철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새 거처 오가화원이 당교(黨校)와 가깝습니다. 당교에 가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4년간 공부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 후) 그렇게 길게 공부할 필요 없다. 2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펑: (짧게) 동의.


마오는 다시 이어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앉아 있는 중앙 책임자들을 다시 둘러보고 펑더화이를 보면서, 마른기침을 하고 입술을 빨았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오가 펑에게 2년 후에는 희망이 있다는 암시를 준 후 펑이 자신을 향해 다시 착오를 인정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펑더화이의 안색은 마치 철과 같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펑더화이도 명확히 알았다. 만일 현재 여러 사람들 앞에서 착오를 인정하고 자아비판을 하면, 자신의 처지가 어느 정도 좋아질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는 것을. 그러나 펑더화이에게 그것은 불가능했다. 루산에서 자아비판 한 것은 대국을 위해서였지만, 그것을 생각하면 마치 수만 개의 화살이 가슴을 뚫는 듯이 아팠다. ‘군사구락부’, ‘외국과 내통’ 같은 죄명을 다시 인정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었다.


이녠당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중에, 펑더화이가 천천히 일어나서 마오와 옛 전우, 동지들에게 목례로 이별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문 밖으로 나갔다.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는 황커청의 후임으로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뤄뤠이칭이 회의 서기장을 맡았고 군부 내의 대표적인 인물 104인이 회의에 참석했다. 이들 대부분은 농촌 출신이고 수많은 전투 경험을 통해서 실제 상황과 정보에서 벗어나면 잠깐의 실수로도 시체 더미를 만들고 패하게 된다는 교훈을 체득하면서 살아온 자들이었기에 대약진운동의 문제를 꿰뚫어 보고 있었고, 이른바 ‘고생산(高生産) 모범농장’을 참관할 당시에 그것이 허풍 쇼이고 가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챘었다.

이들 대부분이 펑더화이가 마오쩌동에게 보낸 의견서 편지 내용을 본 후에 펑이 제기한 문제와 의견에 공감하고 동의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확대회의 개최 초기에는 소조 토론에서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다.


당시 국방부 소속 완이(萬毅, 1907~1997년) 중장은 자신이 조장을 맡고 있는 소조 참가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펑더화이의 의견서 내용은 실제에 부합하고 어디에도 반당(反黨)적인 부분이란 없다. 현재 어떤 사람은 오직 푸른 하늘만 쳐다보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소조 회의 참가자들에게 말했다.


“펑더화이의 의견서에 찬성하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참석자 모두가 함께 손을 들자 완이 중장이 말했다.


“좋습니다. 모두들 찬성하니 소조 해산을 결정합니다. 모두들 돌아가서 각자 공부하기로 합시다.”


소조 회의에서 펑더화이와 황커청 등을 비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개적으로 펑더화이의 의견서에 찬성 의견을 밝히고 소조 해산까지 한 것은 마오쩌뚱의 의중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보고를 받은 국방부장 린뱌오는 뤄루이칭 인민해방군 총사령관과 의논한 후 그날 밤 완이 중장을 체포·구금했고 새로운 소조 조장을 보내 전체 소조 회의를 다시 개최토록 했다.

1> 펑더화이, 루산에서 하산 후 귀가한 당일

1959년 8월 19일 오전, 펑더화이의 조카 펑정샹(彭正祥)이 해군 수병 셔츠를 입고 당시 펑더화이의 거처였던 중난하이 영복당(永福堂) 정문으로 들어섰다. 며칠 전에 하얼빈 군사공정학원 합격 통지서를 받고, 숙부인 펑더화이에게 인사차 온 것이었다. 바로 그때 여동생 펑강(彭鋼)이 나와 오빠 펑정샹을 맞으며 말하기를, 큰아버지 펑더화이의 비서 치쿠이잉(綦魁英)이 난위안 공항(南苑機場)으로 펑더화이 부부를 마중 나가는 길에 자신도 같이 가는 길이라고 했다.
펑정샹도 큰아버지인 펑더화이가 회의 참석차 루산에 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난위엔 공항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펑강은 큰아버지 펑더화이와 큰어머니 사이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차 안의 분위기는 얼어붙은 듯 무거웠다. 펑더화이는 그녀의 손을 꼭 쥔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펑더화이가 말했다.
“얘야, 대학엔 합격했니?”
펑강이 조금 안심한 어투로 대답했다.
“네, 1차 지원한 시안군사전신공정학원에 합격했어요.”
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차가 중난하이로 들어설 때까지 펑더화이는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펑더화이와 푸안슈(浦安修) 부부가 집에 들어설 때, 펑정샹이 황급히 일어나 인사했으나 펑더화이는 그를 향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 잠시 좀 쉬어야겠다”라고 말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약 1시간 정도 지난 후, 펑더화이 부부가 거실로 나오자, 펑정샹과 펑강도 와서 같이 앉았다.
펑더화이가 조카와 질녀를 무겁게 바라보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에게 할 말이 있다. 루산회의에서 내가 마오 주석에게 편지를 썼는데, 착오를 범했다. 반당집단 성격이고 나는 우경 기회주의분자가 되었다.”
……
펑더화이가 조카 펑정샹을 배웅하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현재 당내 투쟁이 매우 복잡하다. 하얼빈군사공정학원에 돌아간 후에 절대로 그곳의 셰유파(謝有法) 정치위원과 류쥐잉(劉居英) 부원장을 찾아가지 마라. 그들은 모두 조선전쟁에서 나의 부하였다. 그들이 나와 연루되게 할 수 없다.”

서 스스로 죄를 인정한 것 후회

같은 해(1959년) 9월 중순에 펑더화이의 조카 펑치차오(彭起超)가 베이징으로 왔다. 당시에 펑치차오는 타이완과 대치 중인 푸젠 전선(前線)에 복무 중이었는데, 루산회의 후에 부대에서 간부들에게 전달해 준 중공중앙 8중전회 문건 내용을 들은 후,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휴가를 신청하고 삼촌인 펑더화이를 찾아온 것이었다.
만면이 진땀에 젖은 조카가 펑더화이에게 말했다.
“큰아버지가 걱정돼서 휴가를 내고 왔어요.”
펑치차오의 물음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부대에서 루산회의 문건을 보고 믿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당 중앙의 결의를 의심할 수도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요?”
펑더화이가 조카를 바라보고 물었다.
“너는 내가 마오 주석에게 보낸 그 편지 내용을 보았느냐?”
“어떤 편지요? 전달받은 적 없어요!”
“그래, 그럼 우선 이 「반당적 만언서(反党的万言书)」부터 읽어봐라!”
펑더화이가 탁자 서랍에서 꺼내 건네준 편지를 읽고 난 펑치차오가 말했다.
“저는 이 편지 내용에서 어떤 착오도 발견하지 못하겠습니다.”
펑더화이가 씁쓸하게 웃고 탄식하듯 말했다.
“그러나 이게 나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반당 강령(綱領)이고, 당과 주석에 대한 공격이다.”
그는 손으로 찻잔 속의 녹차 잎을 꺼내서 입안에 넣고 천천히 씹다가 이어서 말했다.
“루산회의는 본래 대약진 이래 출현한 보편적 좌(左)의 착오를 교정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폐회가 가까워지는데도 여전히 신선회의를 하고 있었고, 시를 읊고 대꾸하고, 연극을 보고 춤을 추고, 중요 문제를 가볍게 이야기하고, 그래서 내 맘이 매우 조급해졌다. 저우언라이와 적지 않은 동지들이 나에게 주석을 찾아가 대화하라고 권했다. 애석하게도 내가 주석을 찾아갔던 그날, 경위가 강력히 제지하여 면담을 못 했다. 그래서 주석에게 7월 14일의 그 편지를 썼다. 명백하게 개인적으로 참고하라고 준 것이었다. 어떻게 나에게 연락조차 한 번 주지 않고 졸지에 ‘펑더화이의 의견서’라고 인쇄해서 전체 회의에 공개하고 비판할 수 있는가?”
펑더화이가 격분하기 시작했다.
“7월 23일 마오 주석이 나를 한 대 때렸다! ‘우경 기회주의 노선’이라 부르며 한 대 치고, 또 다시 과거 이야기를 들춰내며 수십 대를 쳤다. 그리고 입안하고 서명하고, 그 후 반박을 불허한 것까지도 좋다. 문밖으로 끌어내 참수하지 않았고, 당적도 보류해 주었으니! 우리는 징강산 시절부터 31년간 생사고락을 같이 한 전우이다. 내가 그렇게 엄중한 착오를 범했다면 왜 우선 나를 불러서 이야기하고, 타이르거나 충고하지 않는 것인가?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때 다시 중형을 내려도 되지 않는가!” …… 주석이 루산에서 말하기를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의 모든 문제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허풍 떠는 풍조도 좋은 점이 많다. 바람이란 늘 부는 것이니, 전 당과 전 인민을 교육시킬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허풍 과장 풍조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해(危害)를 가져왔는가?”
펑치차오가 물었다.
“대약진 중의 문제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기한다고 왜 옛날 장부를 들추어야 하나요?”
펑더화이가 대답했다.
“옛날 빚을 따지고, 바닥을 들추는 것도 좋다. 단, 실사구시라야 한다! 주석이 내게 ‘3할 합작, 7할 불합작’이라 말했다. 이건 역사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또 말하기를 내가 ‘늘 야심이 있었고, 투기분자’라고 했다. 펑더화이의 양 볼이 가볍게 경직되었고, 두 눈을 감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당에 참가했을 때는 바로 대혁명이 실패하여 장제스가 공산당원들을 잔혹하게 도살하던 때였다. 그렇게 백색 공포의 위험 중에 비밀리에 입당했다. 내가 무슨 투기를 했다는 건지 모르겠다. 핑장 봉기 후에, 전투 능력이 있는 정규부대인 홍5군(紅五軍)을 이끌고 징강산에 올라가서 주더와 마오쩌동(朱毛)과 합쳤다. 만일 그때 내게 야심이 있다면 어째서 그들을 먹어버리지 않았겠는가? 홍4군이 징강산에서 내려간 후에 우리 홍5군이 남아서 산을 지켰다. 우리 부대는 겨우 700~800명이었고, 적은 우리의 30~40배였고 겹겹이 포위했다. 이 혁명대오를 보존하기 위해 나는 낭떠러지 절벽에서 포위망을 돌파했고, 후에 다시 부대를 이끌고 징강산을 수복했다. ‘푸톈(富田) 사변’ 때는 1군단과 3군단을 분열시키려는 음모를 간파하고, 정치위원 마오쩌동을 지지했고, 그에게 3군단에 와서 간부들에게 해명 연설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도 우리 사이에 합작이 3할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는가?”

펑치차오가 손목시계를 보니 이미 새벽 3시가 지났다. 그는 삼촌이 너무 피곤할 것 같아서 수차례 그의 말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펑더화이가 손을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주석은 터무니없는 두 개의 죄명을 지어냈다. 하나는 ‘군사구락부’, 또 하나는 ‘외국과 내통’이다. 어떤 근거가 있는가? 니에롱전과 예젠잉이 나의 일을 담당했고 그들이 간곡히 호소해서 나는 당과 주석의 위신을 위해, 대국(大局)을 위해서 응했다. 그러나 지금은 매우 후회한다. 억지춘향 자아비판을 결코 하지 않았어야 했다.”
펑치차오가 물었다.
“루산회의 참석자는 모두 당의 고급 간부였습니다. 왜 그들은 삼촌을 위해 발언하지 않았나요?”
펑더화이가 탄식하며 말했다.
“이제 당내에서 민주 작풍은 볼 수가 없다. 주석이 한마디 하면, 떼거리로 달려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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