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토비나 산적들은 마을 또는 현정부 소재 도시(현성: 县城)를 점령할 경우약탈을 마친후에는 다시 그들의 근거지로 돌아갔으나, 마오쩌뚱이 지휘하는 '홍군'이라 불리는 패거리의 행태는 달랐다. 그들은 우선 지주와 토호들의 재물을 약탈해서 보급문제를 해결한 후에는 점령지에 당지 ‘공농병정부’ 또는 ‘중화 소비에트 정부’라 명명한 중공중앙 체제하에 통제받는 통치기구인 정치, 행정기구를 건립하고, 당지 인민위원회도 조직했다.
마오가 거느린 소위 "공농혁명군"이 차링(茶陵)에서 닝강(宁冈)으로 철수하기 전인 1927년 11월에, 완안(万安)현의 농민봉기군이 쑤이촨(遂川)과 연접한 장시성 서남부의 완안 현성(县城)을 점령했다. 마오쩌둥은 이 정황을 파악한 후, 완안 농민봉기군을 지원하기 위해 1928년 1월 4일, 공농혁명군 제1단을 인솔하고 남하하여 쑤이촨 (遂川) 현성을 공격·점령했고 이어서 군중 공작을 진행했다. 군중공작은 무력을 기초로 진행해야 하므로 병력을 분산 배치한 후에 진행했고, 이어서 현위원회와 현 ‘공농병(工農兵)정부’를 건립하고 정식 명칭을 중공 쑤이촨 현위원회와 현 ‘공농병(工農兵)정부’라 명명했다.
공농혁명군의 ‘3대 임무’와 ‘3대 기율’, ‘6항주의’
마오는 쑤이촨 현성을 점령한 후 공농혁명군의 ‘3대 임무’와 ‘3대 기율(紀律)’ 그리고 ‘6항주의(六項注意)’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3대 임무’는 첫째, 싸워서 적을 섬멸하고, 둘째, 토호 타도와 자금 마련, 셋째, 군중 공작을 하면서 군중을 도와 혁명정권을 건립한다.
‘3대 기율’은 첫째, 지휘에 따라 행동할 것, 둘째, 노동자·농민의 물건을 빼앗지 말 것, 셋째, 토호를 타도하고 그 재산을 공유로 할 것.
‘6항주의’는 ① (잠자리로 사용한) 문짝은 다시 달아주고, ② 깔고 잔 볏짚은 묶어주고, ③ 말투는 온화하게, ④ 매매 거래는 공평하게, ⑤ 빌린 물건은 돌려주고, ⑥ 손상한 물건은 배상하라.
마오가 이처럼 군대 내부의 민주화와 정치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홍군 내부에 지방 군벌의 군인이나 비적(匪賊), 떠돌이 불량배 출신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6항주의(좌)와 공농홍군 제4군 군기(우)
마오쩌둥의 16자 전술
1928년 1월에는 장시성 쑤이촨현을 점령하고, 공산당 현위원회와 현 공농병정부, 그리고 폭동대, 적위대, 농회(農會), 노동조합(工會) 등 군중 조직을 건립했다. 마오는 쑤이촨 현성 점령 후 그곳에서 전적위원회와 완안현과 쑤이촨현 당위원회 연석회의를 열고 공농혁명군과 완안 농민군의 경험을 총결하는 자리에서 농촌 산악지구 유격전 전술 방침을 4구(句) 16자로 요약했다. 즉, “적이 공격해 오면 후퇴한다(敌进我退), 적이 주둔하면 교란시킨다(敌驻我扰), 적이 피로할 때 공격한다(敌疲我打), 적이 후퇴하면 추격한다(敌退我追)”이다. 이 4구의 유격 전술을 ‘마오쩌동 전술’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마오가 위안원차이와 왕줘 등이 경험으로 축적한 녹림당식 유격전 전투 방식과 주더와 천이, 펑더화이의 군사 지식과 전투 경험을 기초로 대부분 문화 수준이 낮은 농민 출신 홍군 장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총결·정리한 것이다.
마오쩌뚱의 16자 전술
징강산의 토비 혁명가
마오쩌뚱의 징강산 입산은 농촌과 농민 중심의 새로운 혁명 전략 방향을 제시한 발명이고 실천이었다. 이는 중공 창당 초기에 당 중앙의 권력을 장악하고 주도하던 소련 유학파가 당연시하며, 견지해 온 도시 노동자 운동 중심의 혁명 전략에 대한 거부이자 도전이었다. 당시에 코민테른과 소련 유학파가 주도하던 중공중앙의 주류파는 (도시에서의 노동운동을 중시했으므로) 농촌 산간 지구에 근거지를 건설하고 농민을 혁명 역량으로 하자는 마오의 구상과 혁명 전략을 "비적 전술" 또는 "토비혁명가", "산상(山上) 사회주의"라 부르며 비웃고 조롱했다.
그러나 도시노동자 중심의 혁명전략과 난창봉기와 후난성 창샤 점령을 목표로 했던 추수봉기, 광저우봉기 등 대도시 점령을 목표로 했던 무장투쟁이 연이어 패배, 좌절된 후에는 소련 유학파가 주도한 당시의 중공중앙도 마오의 혁명 전략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 4월에 징강산 지구와 인접한 루이진(瑞金)에서 농민 폭동이 발발하여 국민당정부를 몰아낸 후, 6월에 중공중앙이 루이진에 ‘현 혁명위원회’를 건립했다. 이 후 이곳이 중공 공농혁명군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1931년 11월에는 중공중앙 지휘부가 상하이에서 루이진으로 이전해 가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중앙정부’를 건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