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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Nov 07. 2023

국민당 공비토벌군과의 방어 전투

박인성의 중국현대사(7회)

국민당군의 포위 토벌 공격

국민당 측은 공산당이 일으킨 1927년 8월 1일 난창봉기(南昌起義), 9월 9일 추수봉기(秋收起義), 12월 광저우봉기(廣州起義) 등을 모두 진압한 후 이제 ‘공비(共匪)’들의 무장 역량을 거의 대부분 소탕했고, 무시해도 될 정도의 잔당 세력만이 숨어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1927년 11월에  완안 현(萬安縣)에서 완안봉기(萬安起義)가 발발하고 마오쩌동이 지휘하는 징강산지구 공비들이 연이어 차링과 쑤이촨 현성을 공격·점령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가자 크게 놀라서 징강산 공비 근거지 섬멸을 위한 포위토벌 공격을 시작했다.

1930년 10월, 국민당 장시군(贛軍) 제27사의 1개 단과 1개 영이 완안 현으로 진공해 왔고 1개 영이 닝강 동부의 신청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닝강 현성과 징강산 북쪽으로 나가는 출구였으므로 징강산 혁명 근거지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마오는 국민당 장시군 1개 영이 닝강에 진주했다는 첩보를 확인한 후에 휘하 병력 제1단을 인솔하고 쑤이촨으로부터 징강산으로 돌아왔고, 전적위원회 토론을 거쳐서, "적(국민당군)은 아군(홍군) 주력이 아직도 쑤이촨에 있을 거라고 잘못 알고 있으니 이 점을 이용해서 새벽에 기습하자"고 결정했다. 기습 공격을 시작한 후 몇 시간의 격전 끝에 닝강 현성을 점령하고 국민당 방어군 1개 영을 섬멸하고 300여 명의 포로와 무기, 장비, 군수품을 노획했다. 징강산 입산 후 공농혁명군이 국민당 정규군과 겨룬 최초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한편, 홍군은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문제, 즉, 300여 명이나 되는 국민당군 포로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홍군 병사들이 포로를 압송하면서 때리고 욕하고 허리춤 지갑을 뒤지는 등의 행위를 하는 것을 본 마오쩌둥이 그 같은 포로 학대를 금지시켰다. 즉, “때리거나 욕하지 말고 설득하고 교육해서 창끝을 반대로 돌리게 하라”라는 행동 방침을 발표하고 집행했다. 이는 포로에 대한 전향 교육은 물론 국민당이 “공비는 사람을 보는 대로 죽인다”라고 선전하는 전술에 효과적으로 대응한 것이었다.


전투에서 승리가 거듭되면서 포로의 전향과 농민 군중의 참여가 증가하여 1개 단 규모에도 못 미치던 징강산 주둔 홍군 규모가 1928년 2월에는 1개 사단(師), 2개 단 규모로 늘었다. 또한 당지 농민운동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차링, 쑤이촨, 닝강 3개 현의 구(舊) 지방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공농 소비에트 정권과 적위대(赤衛隊), 유격대를 창설했다.



2차 전투

이 같은 ‘공비’들의 동향을 보고 받고 불안과 경계심이 더욱 커진 장제스가 1931년 4월에 ‘제2차 공비 토벌 공격’을 시작했다. 국민당 장시성 군대(贛軍) 제27사 사단장 양루쉬안(楊如軒)이 5개 단을 이끌고 와서 용신을 점령하고 닝강으로 공격해 왔다. 주더와 왕얼저우(王尔琢)가 지휘한 공농혁명군 제4군 주력은 범을 산에서 분리시키는 계책(調虎離山之計)을 채택하여 차오스아오(草市坳)에서 장시성 군대 제79단을 섬멸하고 승세를 타고 기습하여 그날 정오에 두 번째로 용신 현성을 수복했다.

양루쉬안은 부상을 입고 장시성 지안으로 퇴각했고, 홍군은 박격포 7개, 산포(山炮) 2개, 은화 2000여 근을 노획했다.



3차 전투

그해(1931년) 5월에 다시 시작된 3차 포위 토벌군의 규모는 훨씬 더 커졌다. 국민당 장시성 군대 제9사단장 양츠셩(楊池生) 부대를 주력으로 하고 양루쉬안이 최전선 총지휘를 맡고 5개 단이 용신을 점령했다. 국민당 후난성 우상(吳尚)의 부대도 3개 단이 링현을 향해 출동하고 차링에 근접하면서 장시성 부대와 협공해 왔다.


홍4군은 소부대로 후난성 부대를 견제하면서 주력을 집중하여 장시성 부대를 타격했다. 주더와 천이, 왕얼저우가 각자의 지휘하에 6월 23일 신치시령(新七溪岭), 라오치시령(老七溪岭)과 롱위안커우(龍源口)에서 장시성 부대 1개 단을 섬멸하고 2개 단에 치명적 손실을 입히고 총기 300여 정, 산포 2개, 박격포 7개와 대량의 탄약과 약품, 피복을 노획하고 세 번째로 용신 현성을 점령했다. 이는 주-마오 부대가 합류한 이후 처음으로 쟁취한 대규모 승리였다.


마오쩌동은 국민당 장시성 군대의 3차 공격을 제압하고 난 후, 1928년 5월 20일, 닝강 마오핑에서 후난·장시 변계 당(黨) 제1차 대표대회를 개최하고 전략과 임무를 총결했다. 주요 내용은 징강산 근거지 창건 경험, 우경 비관 사상 비판, 도망주의(逃跑主義) 반대, 뤄샤오산맥 중간 지역에 신정권 건립, 토지혁명투쟁 심화 전략, 혁명 근거지 정권 건설 강화, 군대 건설과 당 조직 건설 임무 등이다. 이는 '중국혁명 근거지와 홍군이 존재, 발전할 수 있는가?' 라는 기본 문제와 징강산 혁명 근거지 건설 결심에 대한 믿음과 연결되는 내용이었다.

또한 중공 후난·장시 변계 특위를 구성하고 자신을 서기로 선출토록 했고, 중공 홍4군 군위원회 서기는 천이가 연임하도록 했다. 한편, 변계 각 현 공농병정부를 통일적으로 지휘하기 위해 닝강 마오핑에 ‘후난·장시 변계 공농병 소비에트 정부’를 건립하고 위안원차이를 주석으로 하고, 토지·군사·재정·사법 4개 부(部)와 공농운동위원회, 청년위원회, 부녀위원회 등 3개 위원회를 설치했다.


후난-장시 변계 제1차 당대표대회 모습


중공이 징강산 근거지에서 주도한 무장투쟁의 급속한 발전은 장시성과 후난성의 국민당 군벌 당국은 물론 난징의 국민당 중앙정부에도 이 문제가 이미 심각한 내부의 화근이 되었음을 감지하게 했다. 이에 따라서 이들의 최우선 과제가 ‘징강산 공비’ 섬멸이 되었다.


4차 전투

1932년 12월, 국민당 장시·광동·푸젠(贛粵閩) 변구 공비 소탕 총사령부가 중공의 중앙 소비에트 지구(中央蘇區)에 대한 제4차 포위 소탕(圍剿) 공격을 위해 약 40만 명 규모의 병력을 조직하고, 천청(陳誠)이 지휘하는 장제스 직계 부대 12개 사단 16만 병력의 중로군(中路軍)을 3개 종대로 나누어 주공격 임무를 맡겼다. 중로군은 약 70개 단 16만 병력을 3개 종대로 편성했다. 또한 차이팅카이(蔡廷鍇)가 지휘하는 제19로군과 푸젠성(福建省) 주둔 부대를 좌로군(左路軍), 광동군벌 위한모(余漢謨)가 지휘하는 광동군대를 우로군(右路軍)으로 편성했다. 1933년 1월 1일에 장제스가 난창(南昌)에 와서 직접 공비 토벌군의 총사령을 겸임하고, ‘분리, 진공, 합작 타격’으로 공비 주력을 리촨(黎川)과 젠닝(建寧) 지구에서 섬멸한다는 작전계획 하에 제23사단은 총예비대 외에 4개 사단과 2개 여단이 난청(南城)·난펑(南豊)·러안(樂安)·충런(崇仁)·용펑(永豊) 등지에서 수비 임무를 맡았고, 제3, 제4 공군력인 항공대는 난창을 기지로 하여 작전을 지원했다. 이는 국민당 군대가 징강산으로 진공한 역대급 병력 규모였다.


마오쩌둥은 이같이 급박한 국면에서 1929년 1월 4~7일 닝강현 바이루(柏路)촌에서 전적위원회, 후난·장시변계특위, 홍4군 및 홍5군 군사위원회 연석회의를 주재하고 ‘공세적 방어’ 방침을 채택한다. 홍5군에서 개편된 홍4군 제30단과 위안원차이와 왕줘의 32단은 펑더화이와 텅다이위안의 통일 지휘하에 징강산을 지키고 마오쩌둥과 주더가 통솔하는 홍4군 주력 제28단, 제31단 그리고 직속부대는 국민당군의 경제봉쇄를 뚫고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시성 남부(贛南)로 출격했다. 징강산으로 진공하는 국민당 군대의 상당수를 유인해 내기 위한 계략이었다.


마오쩌동과 주더가 인솔한 홍4군 주력 3600명이 징강산 츠핑에서 출발하여 쑤이촨을 거쳐서 장시성 남부로 진군할 때 거리 요처에 홍4군 군장 주더와 당위원회 대표 마오쩌동이 공동 서명한 ‘홍군 제4군 사령부 포고’를 붙였다. 요지는 “지주의 토지를 농민이 접수하여 경작한다. 채무(债)는 갚을 필요 없고 세금(租)은 낼 필요 없다. 임금인상은 고용주가 책임진다. 8시간 근무를 보장한다. 적의 장교나 사병이 투항하면 이전의 행위는 묻지 않는다” 등이었다.


이 4차 전투의 결과, 홍1방면군이 국민당군 3개 사단을 매복 공격하여 섬멸했고, 1만여 명을 포로로 잡고, 각종 총기류 1만여 정을 획득했다. 이 전투는 홍군 전쟁사상 매복 공격으로 적을 섬멸한 모범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가 공비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벌인 4차례의 포위 토벌 전투에서 모두 패배한 원인은 공비들에 대한 현지 농민들의 적극적 지원과 현지 지형지세를 이용한 홍군의 유격전술 때문이었다. 바로 이 점이 징강산 홍군이 이제까지 국민당 군대가 상대해 왔던 군벌 군대와 다른 점이기도 했다.


홍군 전투장면

홍군 전투장면







마오쩌동은 1년여 기간 동안 실행한 후난·장시 변계에서의 할거 무장투쟁의 경험과 교훈을 1928년 10월~11월 기간에 '중국의 홍색 정권 왜 존재하는가?'와 '징강산 투쟁'이라는 두 편의 저작을 통해 체계적, 이론적으로 정리했다. 중공이 영도한 군사 투쟁은 장기간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한 조건하에 진행되었으므로 전투력에만 의지할 수 없었고 지략의 대결이 중요했다. ‘지략’의 핵심은 적은 강하고 아군은 약한 상황에서 출발해, 유리한 곳으로 향하고 해로운 곳은 피하고(趨利避害), 적의 주력은 피하고 약점을 공격하고(避實擊虛), 융통성 있는 전략 전술을 운용하고(靈活机動), 자기를 보호하고 적을 섬멸한다(护己歼敌)는 목적을 달성하면서 점진적으로 적과 아군의 비교우위 역량을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16자 전술’이라 불리는 농촌 유격 전술은 적을 유인하고 분산시킨 후에 아군의 역량을 집중해서 ‘운동전’으로 섬멸하는 공격 전술이다. 마오의 지침에 따르면 “10개의 손가락 모두에 상처를 내는 것보다 손가락 하나를 확실하게 절단하라”, “10개 사단을 흠집 내기보다는 1개 사단을 몰살시켜라”이다. 이것이 일제 패망 후 중국 대륙에서 본격화된 2차 국공내전(해방전쟁)과 중공 정권 출범 직후 발발한 ‘한국전쟁(抗美援朝戰爭)’ 그리고 현재까지도 중국 인민해방군 전략 전술의 기초가 되었다.


중국현대사 #중국공산당사 #징강산_방어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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