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중국의 정세는 일제가 1931년 9·18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강점한 후 식민지 만주국을 세우고, 1933년 초에는 또 다시 중국의 화북 지구에 대한 공세와 침략전쟁을 시작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장제스(蒋介石)는 여전히 “외적을 물리치려면 필히 우선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攘外必先安内)”는, 즉, 내부의 공비들 부터 진압해야 한다는 방침을 고집스럽게 견지했다.
5차 전투, 홍군 패배
국민당 장제스(蒋介石)는 4차례 징강산 공비 소탕 작전과 전투에서 모두 패배한 이후에 다시 50만 병력을 조직하고, 더욱 철저히 준비한 후 5차 토벌 공격을 시작했다. 이번 5차 토벌 공격은 1933년 9월25일에 시작되어 1934년 10월까지 약 1년 이상 진행되었고, 이번에는 국민당 군대가 승리했다. 중공중앙 홍군 제1방면군은 장시성(江西省) 남부와 푸젠성(福建省) 서부 지구 전투에서 패배한 후, 당 중앙 본부가 있던 근거지 장시성 루이진(瑞金)을 포기하고 포위망을 뚫고 퇴각하기로 결정하고 소위 ‘대장정(大長征)’을 떠나게 된다.
5차 토벌 공격에서 국민당군은 ‘요새(堡壘) 구축주의’라 불리는 신전략을 채택하고 포위, 소탕 전투 방식으로 공격해 왔다. 이에 맞선 중공중앙 홍군 지휘부는, 마오쩌동의 “적을 근거지 깊숙이 끌어들인 후 격퇴한다”라는 유격전술을 ‘패배주의’, ‘도망주의’라고 비판하는 자들이 주도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마오가 주장하는 그러한 전술과는 정반대로 적을 성문 밖에서 막아내고 모든 전선에서 진지전 대 진지전으로 맞서는 전술로 대응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당시 중공중앙 지휘부는 소련 모스크바에서 당 중앙을 지휘하던 왕밍(王明)과 루이진에서 당 중앙 최고 지휘권을 행사한 소련 유학파 보구(博古), 그리고 코민테른 추천으로 중공에 파견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Otto Braun, 중국명 리더(李德)] 등이었다. 이들이 마오쩌동이 건의한 유격전과 운동전을 비웃고 무시하고, 진지전, 즉, 정규전으로 대체하고 대응했고, 이것이 결정적 패인이 되었다는 게 중공 측의 분석이긴 하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도 일리는 있겠지만) 만일 마오가 주장한 대로 방어전투를 진행했다고 해도 이전 4차례 공세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 국민당군의 공세를 막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 판단된다.
장제스의 책사 양용타이(楊永泰)
책사 양용타이(楊永泰)
5차 포위 토벌 공격에서 장제스는 50만 군대를 동원, 조직하는 한편, 책사 양용타이(楊永泰)가 제출한 ‘군사 3, 정치 7(三分軍事, 七分政治)’ 방침을 채택했다.
양용타이는 ‘구시(求是) 통신사’를 조직하여 언론보도를 독점했고, 극단과 공연단(文艺社)을 조직하여 전선의 농민들을 대상으로 선무공작을 하고, 보갑(保甲) 조직을 강화하고, 엄격한 연좌제(蓮坐制)를 실시하는 등 중공 소비에트 지구, 즉 중공이 통치하는 해방구인민에 대해 선심을 베풀고(軟化), 분리하고(分化), 감동시키는(感化) 정책을 시행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중공 소비에트 지구에 가혹한 경제봉쇄를 시행한 것이었다. 결국 중공 홍군은 양용타이가 주도한 이 같은 정치·경제 양 방향의 입체 전술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전투 개시 후 약 1년 만에 패퇴하면서 '도주 대장정’을 떠나게 된다.
1934년 10월에 중공중앙 홍군 약 8만 6000여 명이 중공중앙 근거지였던 장시성 루이진(瑞金)에서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1년여 기간 동안 국민당군의 추격을 피해 퇴각하면서 소위 '대장정'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홍군은 추격해 오는 국민당 및 지방 군벌 군대와의 전투, 험난한 지형과 기후 등에 시달리면서 11개 성, 18개 산맥과 17개 큰 강을 건너 1만 2500km(2만 5000리)를 행군하여 루이진에서 출발한 지 1년만인 1935년 10월에 섬서성 북부 산악지구인 우치진(吳起鎭)에 도달했다. 루이진에서 퇴각할 당시에 8만 6000명 규모였던 병력이 1/10인 8000여 명으로 줄어 있었다.
한편, 중공중앙 홍군이 국민당군의 5차 포위 토벌 공격을 격퇴하지 못한 원인으로, 국민당 장제스의 소극적 항일 방침에 항거해 1933년 11월에 푸젠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킨 차이팅카이(蔡廷鍇, 1892~1968)의 국민당 19로군과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대응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차이팅카이는 상하이사변 당시 국민당 19로군을 지휘하여 일본군과 맞서 용감히 싸운 후 중국내에서 항일 영웅으로 부상한 인물이다. 차이팅카이는 장제스가 일본과 굴욕적인 협정을 맺은 데에 반발해 ‘항일구국’을 기치로 내걸고 푸젠성에 인민혁명정부를 수립했다.
차이팅카이(蔡廷鍇)
이는 중공 입장에서 반(反)장제스 통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중공 당사에서는, 당시에 마오쩌동이 홍군 주력을 차이팅카이의 혁명군이 장악하고 있던 푸젠성을 둘러싼 저장·안후이·장시 지구로 진군시켜 전선 외곽에서 차이팅카이의 푸젠 정부를 지원하자는 전략을 제안했으나 당시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李德)이 반대해서 무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4년 1월에 장제스는 차이팅카이가 세운 푸젠 혁명정부를 진압한 후 100만 군대를 조직·동원하고 현장에서 직접 지휘하면서 중공중앙의 근거지인 장시성 루이진을 겨냥한 제5차 공비 토벌의 포위망을 좁혀왔고, 국민당군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한 홍군은 결국 퇴각 도주 '대장정'을 시작해야 했다.
장정 출발전 중공 홍군, 루이진( 瑞金)
준이(遵義)회의
대장정 과정에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은 초기인 1935년 1월에 홍군이 구이저우성 준이(遵義)를 점령한 후 개최한 중공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이 중공중앙의 주요 지도자 중 1인으로 선출된 것이다. 이 회의가 '준이(遵義)회의'이고, 마오쩌둥이 중공중앙의 지휘권과 권력기반을 강화하면서 중국혁명을 주도해 나갈 수 있는 권력을 획득해 나가기 시작할 수 있었던 때가 바로 이 회의 이후부터였다. 이후 마오는 전투지휘 능력과 권력투쟁 술수를 통해서 점차로 중공중앙의 최고 권력을 장악했고, 1976년 9월에 죽을 때까지 그 권력을 놓지 않았다.
마오의 장정 해몽
마오는 1935년 10월, 섬서성 북부 우치진(吳起鎭)에 도달한 후 장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장정은 혁명의 씨를 뿌린 선언서이고 선전대였다. 12개월 내내 낮과 밤 구분 없이 매일 수십 대의 국민당 공군 비행기가 정찰과 폭격을 해댔고, 땅에서는 수십만 적군이 포위·추격하며 앞길을 막았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과 위험을 겪었다. 우리는 각자의 두 다리로 2만 5000리, 11개 성 지구를 횡단했다.
역사상 이 같은 장정이 있었는가? 없었다. 장정은 또한 선언서이다. 제국주의와 그 주구인 국민당 장제스의 포위 추격이 파산했음을 선언했다. 장정은 또한 선전대이다. 우리가 거쳐 간 11개 성의 농촌과 산간 오지의 주민 2억 군중에게 홍군이 가는 길만이 해방으로 가는 길이라고 선전하고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만일, 장정이 없었다면 광대한 민중에게 홍군의 큰 도리(道里)를 그토록 신속하게 선전할 수 있었겠는가?
장정은 또한 파종기계(播種機)였다. 우리는 수많은 혁명의 종자들을 11개 성 지역 내에 퍼뜨렸다. 그 종자들이 싹트고 꽃피우고 열매를 맺어서 장래에 수확할 때가 올 것이다. 종합하면, 장정은 우리의 승리, 적의 실패로 끝났다. 중국공산당이 아니었다면 이 같은 장정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이제 혁명전쟁을 영도하는 우리의 능력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고 누구도 기회주의의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장정'에 대한 마오의 이 같은 해몽은, 부분적으로 일리가 있겠지만,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선전과 자부심 고취를 목적으로 복무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