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사변 발발 배경
‘시안사변(西安事變)’(1936.12.12)은 국민당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張學良, 1901~2001년)과 서북군(제 17로군) 총사령관 양후청(楊虎城, 1893~1949년)이 당시 국민당정부 최고 지도자인 국방위원장 장제스를 무력으로 구금하고, 장제스에게 그가 강고하게 밀어붙이던 ‘외적을 물리치기 전에 필히 우선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攘外必先安内)’라는 방침 철회와 ‘내전 중지, 일치 항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 군사정변, 즉, 병간(兵谏) 사건이다.
이 사건 발생 일자가 1936년 12월 12일이어서 ‘쌍12사변(雙十二事變)’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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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중공은 ‘장정’을 마친 직후여서 서북 지구에 근거지를 구축하며 전력을 보충·재정비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국민당과 장쉐량의 동북군과 양후청의 서북군을 포함한 지방 군벌들에게 ‘내전 중지, 일치 항일’을 설득하는 공작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따라서 시안사변의 발생은 중공에게 기사회생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었다.
1936년 12월 12일 새벽 3시 반, ‘양귀비 목욕탕’으로 유명한 섬서성 시안(西安)시 교외 화칭츠(華淸池) 별장에서 자고 있던 장제스는 방 밖에서 나는 총성과 소란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건물 밖에서는 장쉐량(張學良) 휘하의 동북군 기병사 사단장 바이펑샹(白鳳翔)이 지휘하는 부대원들이 장제스의 경비대와 경호원을 제압하고 있었다.
변란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장제스는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채로 침실 창문으로 나와 화칭츠 별장 뒤의 리산(驢山)으로 올라가서 산 중턱의 바위 뒤에 숨었으나 뒤쫓아온 동북군 소속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시안 시내 장쉐량 휘하의 동북군 경호 부대 내에 구금되었다.
장제스가 숨어있던 화칭즈 연못 뒤 리산 바위 장쉐량을 포함한 동북군 장병들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고향인 만주에서 쫓겨나 서북 지구에 와서 타향살이를 하고 있었던 연유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특히 더 컸고, 그래서 일본군보다 내부의 공산당부터 소탕하겠다고 주장하는 장제스에 대한 반감도 매우 컸다.
한편, 시안 시내에서는 양후청(楊虎城) 휘하의 서북군(제17로군)이 국민당 중앙 헌병단, 별동대 등 시안 시내 국민당 중앙군 세력과 섬서성 공안국 등의 무장을 해제했다.
공항과 열차역, 우체국 등 요충 시설을 장악하고 당시 섬서성 주석 사오리쯔(邵力子)를 포함하여 난징(南京)에서부터 장제스를 수행하고 시안에 와 있던 천청(陳誠), 장딩원(蔣鼎文),천댜오위안(陳調元),웨이리황(衛立煌), 주사오량(朱紹良) 등 10여 명의 국민당 군부 및 정부 내 주요 요원들을 체포했다.
이 중 장제스와 의형제 관계이고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인 사오위안충(邵元冲)은 창문으로 탈출한 후 서북군 사병의 정지 경고를 무시하고 도망하다가 저격 당해서 죽었다.
구국 8항 주장’ 발표
장쉐량과 양후청은 초기 행동을 완료한 1936년 12월 12일 당일에 전국을 향해 “거사 동기는 항일 구국이다. 장제스의 반성을 촉구한다”라는 성명과 ‘구국 8항 주장(救国八项主张)’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난징 정부를 개편하고 각 당 각파를 모두 수용하고 공동으로 구국의 책임을 진다.
⦁모든 내전 중지
⦁상하이에서 체포한 애국 지도자 즉각 석방
⦁전국의 모든 정치범 석방
⦁민중 애국 운동 개방
⦁인민 집회결사와 일체의 정치 자유 보장
⦁쑨원 총리의 유지(遺志) 실천
⦁구국회의(救國會議) 즉각 개최
시안사변 발발 다음날 신문 보도 기사
외부 국가들의 반응
시안사변의 발생은 중국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톱뉴스로 보도되었다. 단, 세계 주요 국가와 중국 국내의 각 파벌과 세력은 각자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해 중국 내에서 내전을 확대시키면서 국민당정부 내의 친일파를 지원하고자 했다.
따라서 난징 정부에게 시안에 토벌군을 보내고 군사원조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하고, 동시에 독일에서 신병 치료차 요양 중이던 친일파 왕징웨이(汪精衛)를 귀국시켜 국민당정부 내에 친일파들을 조직하도록 했다.
영국과 미국은, 만일 장제스가 살해된다면 친일파가 국민당정부를 주도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중국 내에서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받을 것을 우려했으므로, 시안 측과 난징 국민당정부 측 쌍방이 타협을 통해서 장제스를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갈팡질팡했다. 처음에는 중국정부의 항일을 지지하고 평화적 해결을 희망한다고 발표했다가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후에는 장쉐량과 양후청이 일본의 선동에 의해 시안사변을 일으켰다고 비난했다.
국민당 정부의 대응
시안사변에 대한 각국의 서로 다른 대응 태도가 난징의 국민당정부 내부에도 반영되어 친일파와 영미파가 대립했다.
군정부장 허잉친(何應欽)을 대표로 하는 친일파는 시안을 폭격하고 무력 토벌하자고 주장했다. 대규모 내전으로 확대시키면서 장제스를 제거하고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1936년 12월 16일, 즉 사변이 발생한 지 4일 후에 국민당 중앙정치회의는 허잉친을 반란군 토벌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장제스의 아내인 쏭메이링(宋美齡, 1898~ 2003년)과 그녀의 오빠 쏭즈원(宋子文,1894~1971년) 남매를 대표로 하는 영미파는 장제스의 난징 정부를 지키기 위해 장제스 구출과 평화적 해결을 주장했다.
펑위샹 등도 내전에 반대하고 평화적 해결 주장에 동조했다. 기타 지방의 실세 파벌 중 대다수도 평화적 해결을 지지했으나 소수는 무력으로 시안을 토벌하자고 주장했다.
쏭메이링과 허잉친(우) 장제스 총살 요구 대두
한편, 정변을 일으킨 장쉐량 휘하의 동북군과 양후청 휘하의 서북군 내의 장교 다수는 장제스 총살을 요구했다.
국민당 중앙 정치회의가 개최된 12월 16일에는 시안 시내 각계 인민 10만여 명이 모여 ‘장쉐량, 양후청 구국 선언 지지’ 성명을 발표하고 장제스 총살을 요구했다.
당시 섬서성 북부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중공 홍군의 간부들과 병사들 그리고 중공 관할 근거지의 인민 대다수도 장제스 총살을 주장했다. 한편, 다시 내전이 발발할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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