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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Nov 14. 2023

팔로군, 핑싱관 전투와 백단대전

박인성의 중국현대사(12)

핑싱관 전투

핑싱관(平型關)

중공 팔로군이 제2차 국공합작 국면에서 일본군과 치른 첫 전투는, 1937년 9월 25일 오전 7시경부터 화북 지구 핑싱관(平型關)에서 시작된 ‘핑싱관 전투’였다. 

이 전투 당시 팔로군 115사단장 린뱌오(林彪, 1907~1971년)는 지형지세를 이용한 매복 공격으로 일본군 1000여 명을 전멸시켰다. 

핑싱관 전투는 화북 지구에서 중국 군대가 일본 정규군을 섬멸한 최초의 승리였으므로 중국 전국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당시 30세의 나이로 이 전투를 지휘한 린뱌오는 ‘일본군 불패’ 신화를 깨뜨리면서 중국 항일전쟁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백단대전

한편펑더화이(彭德怀)와 줘췐(左权)이 지휘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1940년 8월부터 12월 초까지 4개월여 기간에 팔로군 129사와 진차지(晋察冀山西省察哈尔省河北省군구 등 모두 105개 연대(團) 20만여 명의 팔로군 병력이 화북 지구 허베이산시(山西) 일대의 일본군을 공격한 전투이다. 1939년 겨울 이래일본군은 철도와 도로를 축으로 팔로군의 ‘항일유격 근거지’ 소탕 작전을 전개하면서타이항(太行근거지와 진차지 등 전략 지구 간 연결을 단절하여 팔로군의 작전 공간을 압축하는 이른바 ‘수롱정책(囚籠政策)’을 추진했다.


이에 대응하여 펑더화이와 줘췐이 지휘하던 팔로군 총부는 정타이(正太) 철도와 통푸로(同蒲路) 북단을 중점 공격·파괴하기로 결정하고 ‘정타이로 전투(正太路戰役)’를 개시했다. 그런데, 병력동원이 진행되고 전투가 시작되자 일본군의 수롱정책으로 피해를 입고, 통한을 품은 팔로군 지휘관과 항일 근거지 민중이 당초 예상보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 참여 규모가 총 105개 단, 20만여 명에 달했다. 당시에 펑더화이와 줘췐이 팔로군 총부 작전실에서 이 같은 상황 보고를 듣고, “좋다, 그러면 이번 전투는 ‘100단 대전(百团大战)이다”라고 한 후 원래의 ‘정타이로 전투’라는 전투명을 ‘백단대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줘췐(左权)


팔로군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모두 1800여 회의 전투를 치렀고 2900여 개 거점을 공격, 점령했으며 일본군 4만 5000여 명을 섬멸했다. 그러나 이에 놀란 일본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화북과 화중 지역에서 중공 근거지 소탕 작전을 추진했고 그 결과 팔로군은 1940년 40만 명에서 1941년 30만 명으로, 신사군 병력은 13만 5000명에서 11만 명으로 감소했다. 

또한 중공이 장악하고 있던 근거지 및 해방구 면적과 인구도 절반 정도로 줄었다. 당시 중공 내부에서는 백단대전 전투로 인해 팔로군의 전력이 노출되어 일본군의 반격과 국민당의 경계심을 유발함으로써 중공이 항일전쟁 기간 중 가장 곤란한 시기(1941~1942년)를 맞았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마오쩌동은 이 전투를 “아군의 전력 감소를 초래한 모험주의 행동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이 때문에 펑더화이는 약 20년 후인 1959년 루산에서 숙청당한 후 격리 심사를 받던 기간과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전담 조사팀과 홍위병으로부터 백단대전 결정 경위에 대해 집요한 심문과 추궁을 당하게 된다.


중국현대사 #중국공산당사 #팔로군 #핑싱관전투 #백단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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