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소개한 중공 팔로군이 주동해서 발발한 '백단대전(百团大战)'에서 일본군과 싸운 수많은 전투에서 팔로군 측이 상당한 전과를 올리긴 했으나, 그 이후 일본군의 보복성 공격이 이어지면서 팔로군의 주둔지이자 본부가 있던 산시성(山西省)과 허베이성(河北省)의 경계지구인 타이항산(太行山) 일대에서 일본군과 중공 팔로군 간에 수많은 전투가 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운동 투쟁과 연관된 가슴 아픈 사건과 사연이 발생했다.
이하에서는 타이항산에서 팔로군과 함께 항일전쟁을 하던 ‘조선의용군’의 사연과 스토리를 김원봉 등이 주동하여 만주에서 의열단을 결성하던 시점부터 간략하게 설명한다.
김원봉과 의열단 창단
조선에서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11월 9일, 만주 지린성(吉林省) 파호문 밖의 한 중국인 농가에 김원봉, 이성우, 곽경, 이종암, 서상락 등 조선 청년 13인이 모여서 ‘의열단’을 결성했다. 이들 청년들이 밤을 새우고 토론하고 그 이튿날인 11월 10일 새벽에 ‘공약 10조’와 ‘7개 살해 대상(七可殺)’과 ‘5개 파괴 대상’을 결의했다(염인호, 1992: 38~41). 이후 의열단은 조선과 중국 내 만주·상하이·우한·충칭·구이린(桂林) 등지에서 강경파 항일투쟁 조직으로 살해 대상인 일본군 장성과 고급관료, 일제 통치기관에 대한 의열활동, 즉, 암살과 파괴 등 의열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약산 김원봉 조선의용대
의열단 창단 후 약 19년 뒤인 1937년 7월 7일에 ‘루거우차오(卢沟桥) 사변’이 발발했고, 그 1주년이 되는 1938년 7월 7일에 의열단 단장과 조선민족혁명당(朝鲜民族革命黨) 총서기 약산 김원봉이 국민당정부에 조선의용군 창립을 제안했다. 그 목적과 명분은 양 민족의 공통의 적 일본제국주의 타도,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촉진, 그리고 조선 민족의 해방과 독립 실현이었다.
이때 장제스 국민당정부는 1936년 12월 시안사건 이후 중공과 항일전쟁을 위한 민족통일전선 구축에 합의한 후였으므로 그 이전까지 고수했던 대일 타협 노선과 반공 정책으로 인한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였으므로, 조선 의열단의 제안에 동의했고, 이에 의해 의열단 단원과 조선민족혁명당 당원들이 ‘조선의용대’ 깃발을 들고 제2차 국공합작 국면의 중국 항일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 앞줄 깃발 뒤 가운데가 김원봉 조선의용대 창건 대회는 1938년 10월 10일(국민당 국경절, 창당 기념일)에 후베이성 한커우(汉口)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국민당 측 주요 인사는 물론이고) 당시 국공합작 정부의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직에 있던 중공 측의 저우언라이도 참석하여, ‘동방의 압박받는 민족의 해방투쟁(东方被压迫民族与解放斗争)’이라는 제목의 축사 겸 강연을 했다.
조선의용대 건립 초기 대원 수는 100여 명이었고, 이들 대부분이 군사학교 등에서 교육·훈련을 받아서 전투 능력과 문화 수준이 매우 높았다. 가령 김원봉과 박효삼(朴孝三)은 황푸군관학교 제4기 졸업생으로 중국군 장교 출신이었고, 평북 정주 출신인 이원은 미국 사관학교 출신이었다. 김원봉의 비서였던 중국인 쓰마루(司馬璐)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들 혁명 청년들은 모두 25세 전후 나이로, 대부분이 혁명가의 집안에서 자라났고, 나라가 망한 후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사이에 부단히 혁명적 훈도(薰陶)를 받아왔고 튼튼한 신체에다 장대(壯大)한 체력을 갖췄으며, 삶의 어려움을 극복해 왔다. 또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굳센 의지와 순결한 사상을 품고 있었으며 사회관계는 단순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적어도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세 가지 언어 문자 해독 능력을 보유했다."
조선의용대
팔로군과 조선의용군
대원들은 건립 즉시 우한(武漢) 보위 전투에 참가했고, 그 후 1938~1940년 2년간 6개 전투 지구(戰區)와 13개 성 지역에서 수차례 전투에 참가하며 조선 민족 특유의 용맹과 기민성을 발휘하며 전공을 쌓았다. 그러나 항일전쟁이 상호 대치 국면으로 전환된 후, 국민당정부는 조선의용대와 조선민족혁명당 대원들의 사회주의사상 경향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며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창설한 한국광복군을 지원하자, 의용대 단원들이 이에 불만을 품었고 다시 중공 측 포섭 공작의 영향 등으로 인해 1941년 3월에 조선의용대 대원 대부분이 충칭을 떠나 뤄양(洛陽)에서 황하를 건넜고, 그해(1941년) 여름에는 팔로군 총부 소재지인 산시성 랴오현(遼縣) 통위진(桐峪鎭)에서 조선의용군 화북 지대(華北支隊)로 개편·합작하여 팔로군 소속으로 항일전쟁에 참여했다. 지대장은 현역 중국군 대좌인 박효삼(김원봉과 황푸군관학교 4기 동기), 정치지도원은 김학무(金學武), 부지대장 이익성(李益星)이었고, 당시 병력은 100여 명이었다. 그 후 팔로군 포병장교인 무정(武亭)이 조선의용군 사령관을 맡았다. 원래 국민당은 중국 영토 내에 외국인 군대가 주둔하는 형식을 불허해서 ‘조선의용대’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나, 중공 팔로군 측은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조선의용군’이란 명칭 사용에 동의했다. 조선의용군은 이미 팔로군 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인들까지 규합해서 정치조직인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했다.
조선의용군, 타이항산지구 1942년 11월에는, 조선독립동맹이 허베이 남부와 산시의 접경 지구인 섭현(涉縣) 중원촌(中原村) 보정사(普定寺) 내에 ‘조선청년혁명간부학교(교장: 武亭)’를 건립했다. 이후 옌안에도 조선청년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고, 수백 명의 조선족 간부들을 양성했다. 1943년 9월에는, 옌안 난좡(南庄)현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운영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팔로군이 발동한 백단대전(1940년 8~12월)과 이어진 일본군의 보복 토벌 공격으로 인해 벌어진 전투에서 손일봉, 한청적, 박철동, 윤세주, 진광화, 호유백 등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희생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전투가 후자좡(胡家庄) 전투와 스즈링(十字岭) 전투이다.
조선의용군 열사 기념관, 허베이성 섭현
후자좡(胡家庄) 전투
1941년 12월, 김세광(金世光)이 인솔한 조선의용군 화북 지대의 무장선전대 28인이 적에게 함락된 싱타이(邢臺) 후자좡 촌에서 팔로군을 지원하는 선전 공작을 진행하던 중, 새벽에 500여 명 일본군이 이 마을을 포위했고 포위망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분대장 손일봉과 대원 박철동, 주동욱, 최철호 등이 엄호 임무를 수행하다 희생되었다. 이들은 수십 배인 적군과의 전투에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적 100여 명을 사살하고 조선의용대 화북 지대 대원 대부분이 포위선을 돌파했다. 당시 중공의 혁명 수도였던 옌안의 ≪해방일보(解放日报)≫와 충칭의 ≪신화일보(新華日報)≫, ≪대공보≫ 등 매체들이 이 전투를 보도했고, 조선의용군과 그들의 항일투쟁 활동을 중국 전역에 알렸다.
1942년 2월 27일, 충칭에서 거행된 손일봉 등 4인 열사의 추도식에서 저우언라이, 덩잉차오(鄧穎超) 부부와 동비우는 “조선 민족 네 분의 전사를 어떻게 추도해야 하나, 필히 하나의 적 일본 강도를 타도하자(怎样追悼朝鲜民族四位战士 必须打倒日本强盗一个敌人)!”라는 추도사를 헌정했다.
스즈링(十字岭) 전투
이어서 1942년 5월에는 일본군 2만여 명 병력이 타이항산 팔로군 총부, 중공중앙 북방국 등 근거지에 대한 소탕 작전을 펼쳐, 조선의용군 등 팔로군 1만여 명이 있는 편청(偏城)과 랴오현 경계 지구의 난아이푸(南艾鋪), 스즈링 일대를 포위했다. 긴급 상황에서 조선의용군이 포위 돌파 엄호 임무를 맡고, 지대장 박효삼의 지휘하에 완강하게 진지를 사수했고, 팔로군 증원부대가 온 후에야 적의 포위망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의 영혼’이라 불리던 윤세주, 타이항산지구(太行區) 당위원회 당교(黨校) 부교장 진광화, 조선의용군 간부 호유백 등이 희생되었다. 중공은 이들 조선 청년들의 시신을 이 전투에서 함께 희생된 팔로군 부총참모장 줘췐의 묘 옆에 안장했다.
윤세주, 진광화의 묘 중공중앙 북방국과 18집단군(十八集團軍) 정치부는 ‘조선의용군 제 열사 기념을 위한 규정판법’을 발표하고, 열사들의 영웅적 투쟁 경력과 사적(事迹)을 중공 통치 지구 내 학교 교재와 교과서에 실어서 광범위하게 선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중공과 인민군대 역사상 외국 국적 열사를 위해 별도로 공문을 발표한 것은 처음이었다.
산시-허베이-산동지구 인민해방군 열사공묘
1942년 9월 20일에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섬서·간쑤·닝샤 변구(陕甘寧邊區) 지회가 옌안에서 개최한 조선의용군 열사 추도대회에 팔로군 총사령 주더가 참석하여 “자유를 위해 희생한 생명 영원하리라”라는 제목의 추도사를 했고, ≪해방일보≫가 윤세주, 진광화 등 열사의 약력과 주더와 예젠잉의 추도사, 그리고 유명 시인 샤오산(肖三)과 아이칭(艾靑)의 헌시 「항전 중 중국에서 죽음을 맞은 조선 동지들」, 「반파시스트 투쟁, 순국한 조선 열사들」이란 추도시를 게재 보도했다. 같은 해(1942년) 10월, 중공은 이들 ‘국제주의 전사’들의 공적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조선의용군 타이항산지구 항일전쟁 순국선열 전적비를 허베이성 섭현 칭장하(清漳河) 변에 세웠다.
팔로군에서 인민해방군으로
조선의용군은 1945년 8월 일제의 무조건항복 후에는 팔로군과 함께 동북 지구(만주)로 이동하여 7개 지대(支隊)로 확대 개편했고, 원래 만주지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북항일연군과 합류하여 제2차 국공내전(해방전쟁)에 참가하여 국민당군과 싸웠다. 이 싸움, 즉 3대 전투 승리 후에는, 션양 주둔 166사단과 장춘(長春) 주둔 164사단, 그리고 린뱌오가 남방 전투를 위해 인솔·지휘해 간 156사단에 소속되었다.
중국 남부지역 전투가 끝난 후 1949년 5월, 마오쩌동은 김일성에게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의 조선인 병사들을 돌려보내주겠다고 김일성에게 약속했고, 김일성도 중공 측에 인민해방군 내의 조선족 장병들을 넘겨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이에 따라 중공측은 만주지구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 장병 1200명과 인민해방군내 조선인으로 구성된 2개 사단 2만 1000여명의 장병을 무기와 장비를 휴대한 체로 북조선으로 보냈다.
그후 부대를 인솔하고 남방전투 수행중이던 린뱌오가 중공중앙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 보고를 보냈다.
"156사단 1만여 명의 조선국적 장병들이 화남(华南) 지구에 진군한 후 정서상으로 파동이 돌출되고 있다. 수많은 조선족 장병들이 조선으로 귀국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국민당과의 내전이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므로 기타 부대의 조선 국적 장병들과 함께 조선으로 돌려보내는 게 좋겠다."
당시에 중공은 이미 승세를 굳혔고 남방의 국민당 잔당 저항세력에 대한 소탕 작전도 마무리 단계에 진입한 상태에서, 방대한 규모의 인민해방군 장병들의 제대와 일자리 안배 문제가 매우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어 있었다. 또한 랴오닝·션양 전투 시 린뱌오가 지휘한 인민해방군의 승리를 위해 결정적 지원을 제공해 준 북조선 김일성 정권의 요청이 있었으므로 중공 측이 이에 동의하고, 1949년 7월 20일, 조선족으로 구성된 인민해방군 164사단 병력 1만 821명과 166사단 병력 1만 320명을 무기와 장비를 지닌 채로 북조선으로 보냈다. 이 두 개 사단 병력 모두 중국의 내전 중 산전수전을 겪으며 실전 경험을 쌓고 단련된 병사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북조선 무장 역량의 절대 주력이 되었다.
이어서 1950년 2월, 남방 전투에 참여 중이던 인민해방군 조선족 부대 156사단과 기타 부대 내의 조선족 장병 총 1만 6452명을 장시성 난창(南昌)에 집결시켜 열차편으로 북조선으로 보냈다. 따라서 이미 그전에 보낸 조선족 장병 1200명과 3개 야전사(野战师) 총 3만 8000명, 그리고 연변(延邊)의 각 현 지구에서 징집한 조선족 장병 4200명까지 더해서 총 4만 4000명의 조선족 병력을 북조선 김일성의 수중으로 넘겨주었다. 이들이 그해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주력군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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