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성의 중국현대사(14회)
1935년 10월, 중공중앙 홍군이 장정 끝에 도달한 곳이 중국 대륙 서북부인 황하 중류 지구인 섬서성 우치진(吳起鎭)이었다. 1936년 12월 시안사건이 평화적으로 해결된 후의 국공 간 평화 분위기 속에 1937년 9월에는 섬서(陕)·간쑤(甘)·닝샤(寧) 변구 정부인 ‘산간닝변구(陕甘寧邊區)’ 정부를 건립했고, 이어서 10월에는 중공중앙 본부를 섬서성 수도인 시안에서 북쪽으로 371km 거리에 있는 옌안(延安)으로 이전했다.
옌안(延安)은, 중공중앙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후 13년간 제2차 국공합작·항일 통일전선 상황과 조건 속에서 혁명과 항일전쟁을 지휘한 중심 거점도시로 발전했다. 2020년 11월 현재 옌안시는 지급시(地級市)이고 행정구역 면적 3만 7000㎢이며 상주인구 약 228만 명이다. 중국 전국 혁명 근거지 도시 중 혁명 유적 보존 규모가 가장 크고 수량도 가장 많은 ‘홍색관광도시(紅色旅游城市)’이고, 전국 차원의 애국주의, 혁명 전통, ‘옌안정신(延安精神)’의 교육 기지이다. 이른바 옌안정신의 주요 내용은, 이론과 실제의 연계, 인민을 위한 복무 그리고 자력갱생·각고 분투의 정신을 포함하고, 본질은 사상해방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이다.
1935년부터 1948년까지 약 13년의 기간 동안 중공중앙과 마오쩌뚱이 이곳 옌안에서 항일전쟁과 그 후의 제2차 국공내전(해방전쟁)을 지휘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실제와 결합시켜 마오쩌동사상을 만들어냈다. 이 기간 중 옌안은 중국 서북부 섬서성 북부의 조그만 농촌지구에서 중국 사회주의혁명 활동의 행정·교육·문화 중심지이자 혁명 수도 역할을 했다.
항일전쟁 발발 후 전쟁의 재난을 겪고 있던 모든 중국인들의 관심은 전쟁의 향배였다. 지구전이냐 속결전이냐? 중국이 과연 승리할 수 있겠느냐? 이에 대해 마오쩌동은 양극단의 관점인 ‘망국론(亡國論)’과 ‘속승론(速勝論)’을 모두 비판하면서 ‘지구전론’을 제기했다.
망국론은 국민당 내의 친일파 왕징웨이(汪精衛) 집단이 주도한 주장이다. 이들은 항일전쟁 발발 이전부터, 현재 중국의 객관적 전투 능력과 역량을 볼 때 일본과 전쟁을 하면 필패이므로 (일본에) 투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속승론자들은 영국·미국·소련에 의지하여 속승(速勝)을 거두자는 주장이었으나 이들도 대부분 항일전쟁 이전에는 망국론을 주장하던 자들이었다.
마오쩌둥은 1936년 7월 16일, 옌안에서 미국 기자 에드거 스노(Edgar Snow)와의 대화 중에, 그리고 다음 해에 섬서성 뤄촨(洛川)에서 개최된 중공중앙정치국 회의(1937년 8월)에서 항일전쟁의 형세와 전도에 대한 분석과 예측을 한 바 있고, 이를 바탕으로 망국론은 투항주의, 속승론은 폐쇄주의라고 비판하면서 항일전쟁은 전략적으로 버티는 ‘험난한 지구전’의 단계이므로 이에 맞는 전쟁 방식으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1938년 5월에는 10개월간의 항일전쟁 경험을 총결하고 “항일 유격 전쟁의 전략 문제”와 “지구전을 논한다(論持久戰)”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지구전에 의한 항일전쟁 전략 방침을 체계적으로 밝혔다. 마오는 다음과 같은 3개 문제에 중점을 두었다.
첫째, 이 전쟁은 반(半)식민지·반봉건 상태의 중국과 제국주의 일본 간의 20세기 30년대에 진행되고 있는 결사적 전쟁이다. 이 같은 시대적 조건의 기초 위에서 전쟁 당사국 양방 간에 상호 모순되는 4개의 기본적 특징이 있다. 즉, ①적은 강하지만 우리는 약하다(敵强我弱), ②적은 퇴보하지만 우리는 진보한다(敵退步我進步), ③적은 작지만 우리는 크다(敵小我大), ④적은 도움이 부족하지만 우리는 많다(敵寡助我多助). 이러한 특징이 전쟁의 진행 과정과 결과를 결정할 것이고 지구전을 통해서 우리가 승리한다.
둘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자유 평등한 신중국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필히 인민전쟁 노선을 견지하고, 군중을 동원하고 군중에 의지하여 전쟁을 진행해야 한다. 전 민중을 동원해 낼 수 있다면 무기의 약세 등 일체의 곤란을 극복하고 적을 멸망의 망망대해 속에 묻어버릴 수 있다. 군대는 필히 민중과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민중이 자신의 편이라 인정하는 군대는 천하무적이다. 망국론자와 속승론자는 물질만 보고 사람을 보지 않는 ‘유무기론자(唯武器論者)’이다. 무기가 전쟁의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보다 결정적 요소는 사람이다. 군사력과 경제력도 사람이 장악하는 것이다.
셋째, 전쟁의 제1, 제2단계에서 팔로군과 신사군의 전쟁 방침은 기본적으로 유격전이다. 단 유리한 조건하에서는 운동전도 고려해야 한다. 전쟁의 형식은 적과 아군 쌍방의 서로 다른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중국의 항일 유격 전쟁은 크지만 약한 중국이 작지만 강한 일본의 공격을 받고 있는 전쟁에서의 전략이다. 한편, 크지만 약한 중국은 진보하는 시대 상황에 처해 있다. 따라서 필히 주동적으로 융통성 있게 ‘방어 중 진공, 지구전 중 속결전, 내선(內線) 중 외선(外線)’을 골간으로 하는 전략 방침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 같은 방침을 통해서만 작은 승리를 축적하여 큰 승리로 만들고, 적과 아군의 우위를 변화시키고 최후의 승리를 획득할 수 있다.
일본군의 점령으로 인해 국민당의 통치 시스템이 붕괴된 농촌지역에 게릴라 유격전 근거지를 확장하면서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니 일본의 중국 침략이 중공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준 셈이었다. 마오는 이 시기에 옌안의 항일군정대학 등에서의 강연 준비 등을 통해서 이른바 ‘마오쩌동사상’을 구성하는 주요 이론들을 완성했다. 이와 함께 옌안 지구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특색’의 문화예술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이것이 중공에 대한 지지층을 민주 당파와 민족주의 진영 등으로까지 확대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한편, 국민당 정권의 지지기반이었던 지주와 신사층은 일본군이 자신들 소유 토지 소재지를 관할하는 도시를 점령하면 도망·피신하거나 일본군 통치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홍군 시절부터 유격전·게릴라전과 근거지 구축에 익숙한 중공의 팔로군과 신사군은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도시의 배후지인 광활한 농촌지역에서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일제 패망 후 1946년부터 시작된 국민당군과의 제2차 국공내전, 이른바 ‘해방전쟁’에서 중공이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기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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