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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Nov 19. 2023

2차국공내전 발발

박인성의 중국현대사(15)



충칭평화 담판, 결렬

장제스(蒋介石)는 일제가 패망하여 투항한 뒤 미국의 지원하에 중공을 제압하기 위한 준비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으나 중공의 선전과 중국내외 여론 압력에 눌려 중공 측에 충칭(重庆)에서 평화담판을 하자고 제안했다. 

마오쩌뚱이 이에 응하여, 1945년 8월 28일, 저우언라이, 왕뤄페이(王若飛) 등 중공 대표단과 국민당 대표 장즈중(張治中), 주중 미국 대사 등과 함께 비행기 편으로 옌안을 출발하여 충칭에 도착했고 이후 10월 10일 옌안으로 돌아올 때까지 43일간 쌍방 간에 수차례 담판을 진행했다. 이것을 ‘충칭 평화담판’(1945.8.29~10.10)이라 부른다.


이 회담에서 쌍방 간에 핵심 쟁점은 중공이 해방구 내에서 자신의 군대와 정권을 계속 유지하는 것에 대한 의견 차이였다중공은 담판 기간 중에도 담판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국내 각계 민주 당파와 민주 인사들에 대한 선전 및 여론전을 전개했고국민당과 중공 측의 군대는 서로 공격하면서 각종 전투를 계속했다.



1945년 10월 10일, 43일간 담판의 결과로 쌍방 대표가 이른바 ‘쌍십협정(双十协定)’, 즉 ‘정부와 중공 대표 회담기요(会谈纪要)’에 서명했다. 즉, “쌍방은 평화·민주·단결·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이를 기초로 장기 합작하고, 필히 내전을 피하고, 독립·자유·부강한 신중국을 건립하자”, 그리고 “민주 당파와 각 당파의 대표와 무당파(無黨派) 인사가 참여하는 정치협상회의를 조직하고 평화로운 건국 방안을 공동 의논하자”라는 데에 합의했다. 담판 중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문제는 해방구 정권 문제와 국민대회(國民大會) 문제, 그리고 군대의 정비 개편(整編) 문제였다.


담판 결렬, 제2차 국공내전 발발

중공 입장에서 ‘충칭담판’의 의미는, 국민당 측이 중공의 지위와 각 당파를 회의 상대로 인정했다는 것, 그리고 중공의 정치적 주장을 전국 인민에게 알리고 그에 대한 이해와 지지의 폭을 넓힌 데에 있었다. 마오쩌동은 ‘회담기요’에 서명한 후 10월 11일에 옌안으로 돌아왔고, 저우언라이 등은 충칭에 남아서 미해결 안건에 대해서 국민당 측과 협상을 계속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11월 25일에 옌안으로 돌아왔다. 각자 모두 승리를 자신하고, 대륙의 정권을 차지하려는 쌍방이 평화적으로 공존할 방법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1946년 6월 26일, 국민당 군대가 공산당의 중원 해방구를 공격하면서 중공 측이 이른바 ‘해방전쟁’이라 부르는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었다.


중공, 공세적 전략으로 전환

중공은 내전이 시작된 그다음 해(1947년) 2월에 군대의 명칭을 국민군 편제하의 팔로군과 신사군에서 ‘인민해방군’으로 바꿨고, 그해 12월에 섬서성 북부 미즈현(米脂縣) 양자거우(楊家溝)에서 중앙 회의를 열고 국민당 정권에 대한 무력투쟁 전략을, 창당 이후 유지해 온 유격전 위주의 전투에서 운동전 위주의 공세적 전략으로 전환한다고 결정했다. 이는 중공이 항일전쟁을 위한 국공합작 기간 중에 힘을 기른 결과 이제 국민당군에 대한 전면전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그 후 1년도 안 된 1948년 7월 초에 국민당과 공산당 쌍방의 병력 차이가 내전 발발 당시 3.14:1에서 1.3:1로 대폭 축소되었다. 또한, 중공이 지휘하는 남방 유격대의 세력도 급속히 증강되어 1948년 가을에는 그 병력 수가 4만여 명에 달했고, 푸젠·광동·장시성 변경, 광동·장시·후난성 변경, 하이난다오(海南島), 광동·광시성(廣西省) 변경, 광시·윈난(雲南)·구이저우성 변경, 안후이·저장·장시성 변경, 저장성 동부와 남부, 장쑤성(江蘇省) 남부 등 곳곳에 유격 근거지를 구축하고, 국민당 통치 지구 후방을 위협했다.



농민의 지지와 생산 적극성 견인

당시에 중공이 장악, 통치하고 있던 해방구의 면적은 중국 대륙의 1/4에 달하는 235만 km2, 인구는 1억 7000만 명에 달했다. 이 중 약 1억 인구를 점하는 해방구에서는 이미 토지혁명투쟁을 완료하여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 대중의 공산당에 대한 지지와 생산 적극성이 거의 절정에 달한 상태였다.


농민들은 만일 인민해방군이 국민당군과의 전투에서 패퇴하게 되면 국민당 군대와 정부와 함께 옛날 지주가 다시 돌아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분배받은 토지를 다시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걸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인민해방군의 승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국민당군의 동태 관련 정보를 중공 측에 알려주고 나아가 스스로 인민해방군에 자원입대하기도 했다. 늙은 농민이 자신의 아들에게 “나는 나이가 많으니 네가 애비 대신 싸워서 우리 땅을 지켜라”라고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항일전쟁 말기에 국민당 군대와 본부는 대부분이 일본군의 공세에 쫓겨서 쓰촨성(四川省) 충칭을 비롯한 오지에 있었지만, 중공의 팔로군과 신사군은 일본군과 가까운 곳의 산간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 유격전 방식으로 전투를 지속해 왔기 때문에 일본군이 물러간 직후 국민당군에 비해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다.


1947년 가을까지 국민당군은 (정규군과 비정규군 모두 포함) 약 152만 명이 중공의 인민해방군에 의해 섬멸되었으나, 다시 대량의 보충 과정을 거쳐서 약 365만 명 병력 규모(이 중 정규군은 285개 여단, 198만 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군 대다수는 사기가 매우 낮은 상태였고 상당수가 당장 실전에 배치할 수 없는 신규 보충병들이었다.


반면에, 중공의 군대는 2년간의 전쟁을 거치면서 총병력 수가 127만 명에서 280만 명으로 늘었고 이 중 정규군(野戰軍) 병력이 149만 명이었다. 총병력 수로는 국민당군이 1.3배 정도로 많았지만 인민해방군은 후방을 장기간 안정되게 굳히고 있었기에 병력을 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다. 또한, 도처에 산재한 유격대가 국민당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있었으므로, 최전선에서 기동 가능한 병력 수는 오히려 국민당군을 압도했다.


군사 형세가 이처럼 갈수록 악화되고 불리해지자 국민당 통치 지구 내의 중간계층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국민당 내부의 모순과 갈등도 더욱 심화, 돌출되었다. 부총통 리종런(李宗仁)은 장제스의 총통 직위 탈취를 기도했고, 일부 지방의 실력파들은 공산당과의 연결을 강화하면서 투항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또한, 국민당 통치 지구의 경제도 붕괴 상태가 되면서 장제스의 국민당 세력은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황이 되었다.




3개 대전투(三大戰役) 발동

중공은 이 같은 국면에서 1948년 9월 8일에 최후의 농촌 소재 중공중앙 본부였던 허베이성 시바이포(西柏坡)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한다. 중공중앙이 1947년 3월 국민당군의 공세를 피해 옌안에서 퇴각한 이후 처음 개최한 정치국 확대회의이고 회의 참석자가 역대 가장 많은 중앙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국민당과의 전쟁을 전면 공격 위주로 전환한다는 ‘전략적 결전(決戰)’과 ‘3대 전투(三大戰役)’ 발동을 결정했다. ‘3대 전투’란 1948년 9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중공 인민해방군이 약 5개월간 국민당 군대를 공격한 랴오닝·션양 전투(遼沈戰役), 화이하이 전투(淮海戰役), 베이핑·톈진 전투(平津戰役)를 가리킨다. 중공은 이 ‘3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고 중국 대륙의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중국현대사 #충칭평화담판 #제2차국공내전 #해방전쟁












https://youtu.be/AHy9jRpwc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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