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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Nov 20. 2023

국민당군과 인민해방군의 전력 비교

중국현대사(16)

제2차 국공내전이 발발한 1946년, 국민당군 총병력은 430만 명이었고 이 중 정규군은 356만 명으로 육군 86개 사단, 248개 여단 약 200만 명, 특종병 36만 명, 공군 16만 명, 해군 3만 명, 기타 군사 기관 총 101만 명을 포함하고 이 외에 비정규군이 74만 명이었다. 86개 사단 중 미국제 또는 반(半)미국제 무기와 장비로 무장한 부대는 22개에 불과했다. 더구나 중국 전장에서는 미제 무기나 장비가 실용적이지 못했다. 천이(陈毅)가 전쟁 지휘 경험을 총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미제 무기는 화력은 강하지만 익숙지 않아서 기민하고 융통성 있게 움직일 수 없었고, 또 소모되는 탄약은 매우 많은데 운송수단이 부족해서 공급할 수가 없었다. 미제 장비는 이(利)보다 해(害)가 많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해도 이와 해가 대등했다.”


같은 시기, 중공 인민해방군은 약 127만 명이었고, 이 중 야전군 61만 명, 사단급 22개, 여단급 94개, 그 외에 지방 부대와 후방 기관이 약 66만 명이었다. 인민해방군의 장비는 국민당군과 비교하면 낙후했다. 단, 그렇다고 (중국 내 온라인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중공 인민해방군 측이 구식 소총만 보유하고 있었고 그렇게 열악한 조건에서도 영웅적으로 싸웠다는 식의 그런 것은 아니다.


기실 2차 국공내전 발발 시에만 해도 인민해방군은 포병 14개 단, 17개 영과 38개 연(連)을 보유하고 있었고 기병 소총, 자동소총, 경기관총 등 각종 총기 수량도 적지 않았다. 병력 수는 국민당군에 비해 대략 3.4:1 정도로 열세였다. 더구나 국민당군은 일본군으로부터 대량으로 획득한 무기를 갖고 있었고, 무기, 기동성 면에서 절대 우세였다.


그러나 내전 발발 1년 이 지난 1947년 7월에 중공의 군사력은 작전 부대 90만 명, 지방 부대 60만 명 그리고 군사 기관 인원 40만 명으로 총 190만 명에 달하여 국민당군과의 비율 차가 약 2:1수준으로 좁혀졌다. 다시 1년 후인 1948년 6월경에는 국공 쌍방의 군사력 차이가 더욱 줄어서 1.3: 1 정도로 기본적으로 평형상태에 도달했다. 그 2년간 국민당군 손실 병력은 약 264만 명이었고 보충을 거쳐서 365만 명으로 회복했다. 그러나 그중 일선의 작전에 배치할 수 있는 병력은 174만 명에 불과했다. 중공 인민해방군은 2년간의 내전 중 손실 병력이 약 80만 명이었으나 신규 징집병 110만 명, 복귀한 부상병 45만 명, 사상개조 포로 80만 명, 그리고 투항한 국민당 부대 등을 합하면 총 280만 명에 달했다. 1949년 2월에는 인민해방군 병력 수가 국민당군을 압도적으로 추월했다. 국민당군 총병력은 204만 명으로 줄었고 이 중 작전에 동원할 수 있는 육군 정규군은 약 146만 명 정도였으나 인민해방군 총병력은 358만 명을 넘어섰다.


국민당군과 중공 인민해방군과의 싸움이 계속될수록 인민해방군은 늘었고 국민당군은 줄었다. 또한, 국민당이 미국 원조를 제한적으로 받았지만 인민해방군은 노획을 통해서 대량의 자동무기, 대구경 화포, 탱크, 자동차 등 현대 장비를 획득했다. 야전군 병종(兵種)도 보병, 포병, 탱크병, 기병을 모두 완비했고 장비 면에서도 더 이상 명확한 차이는 없어졌다.


중공 측이 1950년 7월에 발표한 ‘해방전쟁 4년 종합 전적’에 의하면 1946년 7월부터 1950년 6월 기간 중 인민해방군이 섬멸한 국민당군은 정규군 554만 2470명, 비정규군 252만 8880명으로 총 807만 1350명이다. 이 중 포로 458만 6750명, 부상자 171만 1110명, 투항자 63만 3510명, 봉기자 84만 6950명, 접수 개편자 29만 3030명이다.





중국현대사 #중국공산당사 #중공과_국민당간_전력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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