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제(井田制)는 중국 고대 씨족사회 말기부터 노예제 시기에 걸쳐서토지 공유(公有) 또는 국유(国有)를 전제로 시행되었던 토지제도이다.
정전(井田)이란 명칭은, 경지를 도랑(沟, 渠), 도로 등에 의해 면적이 같은 사각형 논으로, 획분한 ‘井’자 모양으로 구분한데에서 유래했다.
즉, ‘井’자 모양으로 구분된 9개의 정방형 단위농지 중, 중간에 위치한 농지는 공전(公田)으로 하고, 나머지 8개 단위농지를 8호의 농가에 배분하고, 8호의 농가가 각자 배분받은 자기 경지를 경작하면서, 공동으로 중간에 있는 정방형 공전(公田)을 경작하는 제도를 가리킨다.
즉, 정전제(井田制)는 중국 고대 농촌공사(农村公社)의 토지공유와 평균분배 사상을 기초로 하는 토지제도이다.
고대 노예 농민
하(夏)대 이전 시기, 고대 중국에서 노예제 사회 이전의 씨족사회 농촌공사 시기에는 토지소유권 개념 자체가 없었거나 구분되어 있지 않은 씨족사회 공동소유(共有) 상태였으나, 농업정착, 노예제 사회 및 국가가 형성되면서 토지소유제가 국유(国有) 혹은 왕유(王有)로 변했다. 즉, 왕유 토지를 노예에게 경작하게 하고, 노역지대(劳役地租)를 납부하게 했고, 국왕은 귀족들에게 토지 사용권과 수조권을 분배해 줬다.
이 시기에 국왕은 명의상으로만 전국 토지의 소유자였을 뿐이고, 실제 토지관리는 등급별 토지점유제도를 시행했다. 즉, 국왕은 토지를 그 토지상의 농노와 함께 제후와 신하에게 분배해 주었고, 제후와 신하는 분배받은 토지에 대한 점유·사용·수익권(수조권)만을 향유할 수 있었고, 토지 소유권을 대표하는 처분권은 없었다.
정전제(井田制)의 기본 기능은 농토를 분배하고 관리의 녹봉(祿俸)을 통제하는 데에 있었다. 농민에게 농지를 분할, 분배하는 분전(分田)의 대상은 개체 농민이고, “부(夫)” 또는 “가(家)”라고 칭한 남성 가장(家长)을 대표로 했다.
단위 분할 토지는 100무(亩)를 기준으로 하고, 서로 다른 토지등급에 따라 서로 다른 수량의 휴한전(休闲田)이 부가되었다. 상급 농지(上田)는 1년간 1회 경작하고 호(户)당 100무(또는 3년간 2회 경작하고 호당 50~100무), 중급 농지(中田)는 2년간 1회 경작하고 호당 200무, 하급 농지(下田)는 3년간 1회 경작하고, 호당 300무였다. 성인 남자는 가정을 이룬 후에 농지를 분배받고(授田), 늙거나 병들었을 때 농지를 반환(还田)했다.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평민)은 토지에 속박되어 평생 농촌을 벗어날 수 없었고, 분배받은 토지에 대한 사용권만 있었고 소유권은 없었다. 매년 봄에 농지 간의 도로와 도랑을 검사 및 수리했고, 3년에 한 번씩 농지를 재분배·조정했다. 물론 노예는 제외하고, 노예주와 귀족들이 주체이자 대상이었다.
이와 같이 토지와 노동력이 상호 결합된 정전(井田)은 상급 귀족이 하급 귀족에게 봉록을 주고 통제하는 단위이기도 했다. 각 급 귀족에게 지급된 농지 주위를 파고, 도랑을 만들고, 흙을 도랑 변에 쌓고, 나무를 심은 것을 봉구(封沟) 또는 봉강(封疆)이라 불렀으며, 이는 관개(灌漑)와 경작을 위한 일종의 토지사용권의 경계표지(标志)였다. 편리하게 통제하기 위해 귀족들은 농지분배의 기초 위에 농민들을 편제(编制)했으므로, ‘정(井)’은 당시 민호(民户) 편제상의 기본 단위 명칭이기도 했다.
정전제 개념도
정전제(井田制)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일종의 토지분배제도의 역할을 했으며, 토지 공유제(公有制)의 기초 위에서 개별 가정의 독립경영을 표현했다.
둘째, 토지의 평균분배를 강조했다. 토지 분할은 평균분배를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세째, 공동사회 구성원의 집체노동에 의한 경영 방식으로, 공동경작(共耕)과 사유경작(私耕)의 결합을 강조했다.
정전제(井田制)의 와해
정전제(井田制)는 중국 역사상 매우 긴 시기(약 1700여년) 동안 실시되었는바, 이는 정전제가 당시의 사회·경제 조건에 의해 형성, 운영된 것임을 설명해준다. 즉, 당시 생산력이 비교적 낮고,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또한 비교적 단순한 농업경제하에서 기본적으로 평균주의제도를 실행했기 때문에, 이 제도를 돌파하는 상황도 그만큼 늦게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조(夏朝)에서 춘추전국시대에 생산력 발전과 인구 증가와 함께 토지 사유제가 확대되면서 정전제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다.
생산력의 발전과 상품 교환의 활성화
생산기술과 생산도구의 발전은 정전제(井田制) 와해의 중요한 요인이다. 춘추시기에 중국은 철기시대에 진입했고, 철 제련업(炼铁业)이 출현함에 따라 철제 쟁기와 소를 이용한 경작 기술과 농업생산력이 급속하게 발전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전제에 의해 경지를 분배하는 방식을 적용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춘추 시기의 진(晋)국과 전국 시기의 진(秦)국, 그리고 이후의 진한(秦汉) 시기의 농지분배제도(亩制)를 근거로 보면, 장정 한 사람 당 분배되는 토지가 50무에서 70무로 확대되었고, 후에 다시 (70무에서) 100무로 확대되었으며, 1무당 장정 12인에서 5인으로 개정되었다. 또한,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제고되면서 개체소농(个体小农) 경영을 가능하게 했고, 공사(公社)에 속한 농민이 공전(公田)의 공동경작(共耕) 경영 방식에 대한 개선을 요구했으며, 사전(私田)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사회생산력의 발전은 한편에서는 공동경작제도의 붕괴를 가속화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 분업과 상품경제의 발전을 촉진했다. 춘추전국 시기에 상업이 활발하기 시작했으며, 식량뿐만 아니라 섬유, 비단, 철, 도자기 등 물품의 교환이 가능했고, 노동력과 토지도 상품이 되었다. 이에 따라서, 정전제(井田制)의 유지는 갈수록 곤란해졌다.
인구 증가
춘추전국 시기에 인구와 노동력이 증가하면서, (새로 개간하는 경지면적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토지가 갈수록 부족해졌고, 이로 인해 정전제(井田制)에 대한 개혁 요구가 갈수록 빈번하게 제기되었다.
인구와 노동력 증가는 인구수 증가라는 양적 측면과 함께질적 측면에서 생산기술 발전에 따른 노동생산성 증가와 함께진행되었다.
이에 따라서 농노제 집체노동과 목재, 석기, 조개, 그리고 소량의 청동제 농기구 등에 의존해 온 ‘정전제(井田制)’를 유지하기가 갈수록 곤란해졌다.
농민 봉기와 신흥 지주의 정권 투쟁
농민봉기
노예와 공사농민(公社农民)이 노예주 귀족에 반항하는 계급투쟁과, 신흥 지주계급간의 정권 투쟁도 정전제를 동요시켰다. 노예사회 시기에 노예주 귀족의 공사농민과 노예에 대한 잔혹한 착취와 압박은 공사농민과 노예들의 반항을 야기했고, 이들이 태업과 도주 등의 방식으로 저항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춘추전국 시기에는 전쟁이 매년 그치지 않고 일어나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었고, 농민의 무장 반항과 대규모 봉기가 노예주 귀족의 통치에 심각한 타격을 줌에 따라 정전제(井田制)의 와해를 더욱 촉진했다. 이와 동시에 귀족 간의 상호 토지 약탈로 인해 상황이 갈수록 문란(紊乱)해졌다. 대표적인 사건이 진(晋)의 대부(大夫) 위쯔(郄至)와 주간왕(周简王) 사이에 발생한 농지 분쟁 사건이다.
이러한 실정들은 '좌전(左传)'과 '시경(诗经)'에 모두 기재되어 있는바, 이는 국유제를 기초로 한 정전제가 이미 와해되기 시작했고, 토지국유제가 토지사유제로 전환되고 있음을 설명해준다.
정전제(井田制)의 붕괴는 사회생산력의 제고, 잉여노동산품 제공 가능성의 증대, 교환행위의 빈번화, 그리고 일부 귀족과 평민의 빈부 분화(贫富分化)의 가속화에 수반되어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