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징원(周鯨文) 쑤쿠(诉苦)운동과 소위 토지혁명투쟁의 잔인성을 포함한 중국공산당의 실상과 문제를 고발, 비판한 대표적인 인물이 중국 "민주동맹"의 주요 발기인이었고, 랴오닝성 션양(沈阳) 소재 동북대학 부총장, 그리고 중공정권 출범 후 정치협상회의 위원과 지린성 부주석을 역임한 바 있는 저우징원(周鯨文)이다.
저우징원은 랴오닝성 진현(锦縣) 출신으로 본인 스스로 사회주의자라 자처하는 민족, 민주주의 진영의 인사였으나 공산당의 노선과 행동은 회의하고 의심했기에 원래는 중공 측에 가담하지 않았고, 친국민당 민주 당파 발기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에, 장제스(蒋介石)가 (국민당에 대한 비판을 거듭하는) 민주당파 운동 본부를 해산하자, 국민당 본부가 있던 충칭(重庆)에서 홍콩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고 민족, 민주주의 운동을 했다. 그러던 중에, 중공이 정권 출범 준비를 하던 1949년 8월에 저우언라이(周恩来)의 포섭 활동에 설득당하여 홍콩에서 대륙으로 들어와서 약 8년간 지린성(吉林省) 부주석 등 중공 내 요인으로 활동했다.
폭풍우 십 년(风暴十年) 그러나 결국, 중공 내부에서 중공의 실체를 직접 경험하고 확인하면서 환멸을 느끼고 1957년에 다시 홍콩으로 탈출했다. 그 후 1959년, 홍콩에서 자신이 중공 치하 중국 대륙에서 직접 겪은 경험과 자신의 견해를 담아 기록 정리한 '폭풍우 십년(风暴十年)'이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저우징원은 공산당의 청산 투쟁과 토지개혁운동이 실제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직접 목격한 참혹한 장면들을 자신의 의견과 평가를 곁들이면서 폭로했다(저우징원, 김준엽역, 1963: 126~156). "역사의 증인으로서 이 기록을 현 시대에 살고 있는 자유인과 우리들 후세의 자손들에게 남길 책임이 있다"고 말하면서…….
중공의 토지개혁 투쟁은, 닭을 죽여서 원숭이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반항 또는 비판하는 자들을 제압하고 청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같은 방식을 혁명전쟁 과정에서 군중 동원을 위한 전략 전술 수단의 일환으로 채택한 것이라면 그 불가피성을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정권을 잡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출범시킨 후에도 (법에 의한 통치보다) 이 같은 '운동' 수단을 채택한 점에 대해서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저우징원은 중공이 시행한 토지개혁의 방법과 작풍의 잔인성에 대한 폭로, 비판을 자신의 고향인 서만주지구에서 지주와 농민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즉, 그가 태어나고 자란 서만주 랴오닝의 농민 대부분은 2~3세대 전에 산동·허베이·허난 일대에서 이주해 온 자들의 후손이고, 이들은 어린애를 등에 업고 기근을 면하려고 만주족의 봉금령으로 인적이 끊겨 있던 드넓은 만주 벌판으로 와서 자기 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자기 소유 토지로 만들었고, 그렇게 2대나 3대를 거치면서 지주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저우징원이 태어나고 자란 그 촌락에는 당시 270여 호의 농가가 있었고, 마을 전체에서 세 집 빼고는 어느 집이나 생계를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만큼의 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40여 년간 자라면서 보아온 바에 의하면 그 마을에서 지주라 할 만한 대표적인 유형이 세 집 있었는데 모두 근검절약하며 열심히 농사짓고, 농한기에 부업을 하는 방식으로 지주가 되었지, 결코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거나 술수를 부려서 타인의 땅이나 재산을 빼앗거나 했던 자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공산 정권하에서는 모두 이른바 ‘악패(惡霸)로 지목받았고 집과 땅,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대부분 생명까지 잃었다.
1950년 6월 30일, 중공은 ‘토지개혁법’을 공포하고, 지주계급을 없애고 봉건적 착취의 토지소유제를 농민을 위한 토지제도로 바꾼다면서 ‘이것이야말로 수천 년 중국 역사상 가장 철저하고 위대한 개혁’이라며 자화자찬식 의미 부여를 했다.
이 토지개혁은 1952년 말에는 소수민족 지구를 제외한 중국 대륙 대부분의 지구에서 진행·완료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다시 3년 후인 1955년 말경에는 무상분배 된 토지가 집체소유로, 그리고 다시 ‘인민공사’ 소유가 되었다.
그렇다면, 중공이 토지개혁 투쟁을 추진한 목적과 의도, 그리고 이 운동을 통해서 얻은 성과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저우징원은 “계급투쟁을 전개하여 지주계급을 소멸시키고, 다수의 빈민 중심의 군중을 공산당 편으로 끌어오기 위한 것이고, 이것이 공산당의 전형적인 운동 수법이다”라고 분석했다.
즉, 공산당이 무슨 일을 벌이고자 할 때는 우선 그 일의 지향 방향과 목적 등을 멋지게 치장한, 그러나 매우 추상적이고 장기적인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군중을 선동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가는 과정은 반드시 공산당 일당독재체제가 영도해야 한다면서, 그런 주장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해 과학적 논거도 갖추고 있다고 선전했다.
그렇다면, 만주지구에서 토지개혁 투쟁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중공이 만주의 토지개혁 전략을 중시한 배경에는 일본의 패퇴로 항일전쟁이 끝난 후 다시 시작된 국민당과의 내전 국면에서 우선 만주지구의 전투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민 군중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동원해야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무상몰수, 무상분배’ 구호를 내건 토지개혁 투쟁이었다.
토지개혁 투쟁대회 중공의 청산 투쟁은 향촌에서는 토지개혁운동을 통해서, 그리고 도시에서는 반혁명 진압 운동을 통해서 추진되었다.
즉, 토지개혁운동은 1927년 9월, 마오쩌동의 지휘하에 후난성 창샤(长沙)를 공격하러 가던 추수봉기군이 국민당군의 매복에 걸려서 참패를 당한 후 패잔병 무리를 이끌고 징강산에 들어가서 지역의 토호와 지주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토비 혁명 활동을 전개해 온 이래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온 수법이고, 중공의 실력이 강해진 후 점령, 접관한 도시에서는 반혁명 진압 운동을 추진했다.
저우징원은 중공이 농촌과 도시 지구에서 추진한 이 ‘운동’들의 잔인성을 폭로했다. 그중 농촌지구에서 지주와 부농을 대상으로 행해진 토지개혁 투쟁 과정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참혹한 몇 장면을 보자(저우징원, 김준엽역, 1963: 132~139).
토지개혁 투쟁 운동의 진행은 어느 촌락에나 있게 마련인 정업(正業)이 없는 무뢰배, 깡패들, 또는 만주국과 국민당 출신 경찰, 관리, 밀정들, 이런 부류 위주로 ‘토지개혁기간대(土改基干隊)’를 조직하고, 공산당의 무력과 위력을 배경으로 이들에게 향장, 촌장, 또는 토개대(土改隊) 대장 등의 완장을 채워주고, 투쟁 대상으로 선정된 향촌, 부락에 파견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된다.
토개대와 열성분자는 그 마을의 빈농과 고농의 집에 분산 배치되어 숙식을 함께하면서 그 집의 가족들에게 왜 지주를 타도해야 하는지를 열심히 설득하며 부추긴다. 그러나 만주지구의 대부분의 순박한 농민들은 그런 선동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지주는 좋은 사람이고 자기들에게 아무런 나쁜 행위를 한 적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되면 공산당이 원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가 없다. 그래서 쑤쿠(诉苦)대회를 열고 대열 내에 이른바 ‘기본군중’이라 부르는 적극분자들을 배치하고 각본대로 바람을 잡는다.
쑤쿠(诉苦) 투쟁대회 대회 주석이 대회장에 모인 군중을 향해 “이런 악질 지주는 죽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면, 군중 속에 배치해 놓은 적극분자가 “죽여라, 죽여라” 소리치고 호응하며 바람을 잡고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러나 그렇게 분위기를 잡으려고 노력해도 대다수 군중들은 입을 다물고 단상의 지주를 동정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경우도 있다.
공산당의 의도대로 분위기가 고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농민들에게 “너도 지주 편이냐?”라고 윽박지르고 협박하기도 하고, 지주를 다른 마을로 보내서 쑤쿠诉苦 대회를 다시 열거나 다른 마을의 적극분자들을 데리고 와서 다시 바람을 잡으며 분위기를 조성하고 시범 케이스로 지주 몇 명을 현장에서 즉결 처분으로 총살하거나 때려죽인다. 원숭이들 앞에서 닭을 죽이면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포심과 군중심리로 조성된 광란의 흥분상태 분위기에 휩쓸려서 잔인한 행동에 가담하게 된 농민들은 이제 공산당과 한배를 탄 운명이라 여기게 되고, 이후에는 마치 볼모나 포로처럼 공산당의 의도대로 동원되고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이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 토지개혁 투쟁 과정에서 지주들에게 가해진 잔인한 폭행과 학살 상황은 매우 참혹했다. 그중 극심한 몇 가지 사례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마을에서는 지주의 온몸을 밧줄로 묶어서 망향대(望鄉臺)라 불리는 큰 나무 가지 위로 끌어올리고, “네가 착취하고 괴롭혀 온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라”라며 조롱하며 매달아 놓고 희롱하다가 밧줄을 늦추어 땅바닥으로 떨어뜨려 죽였다. 만일 한 번에 죽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끌어올리고 떨어뜨리기를 되풀이했다.
또는 지주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하고, 바로 그 구덩이에 생매장하기도 했다.
어느 겨울철에 저우징원이 한 촌락의 토개대를 방문했을 때에는 그 마을 토개대 간부가 영하 수십 도의 겨울 날씨에 발가벗기고 소 외양간에 가두어둔 지주를 보여주었다. 그의 알몸 피부가 마치 털 뽑힌 돼지 피부와 같은 흑색이 되어 있었다. 토개대 간부가 자신들의 운동 적극성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그 지주를 끌어내서 마당 앞뜰 나무에 묶고 몽둥이로 때렸다. 그러자 마치 소가 울듯이 ‘음머엉, 머엉’ 하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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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W6Lre2sgQ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