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세를 굳힌 중공은, 1949년 3월, 당시 중공중앙 근거지 총사령부가 있던 허베이성 시바이포에서 제7기 2중전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의 주요 안건은 ‘신중국’ 건국 기념행사 일시를 정하고 그 행사준비 계획 수립에 관한 것이었다.
원래, 중공은, 당분간 계속 적지 않은 역량을 지역 토호 등 국민당 지지 세력 잔당 처리와 화남(華南) 지구 각 성의 문제 해결 등을 위해 집중 투입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건국 기념행사를 그 이듬해(1950년) 1월경에 개최하기로 정했었다.
그러나 타이완으로 퇴각한 장제스와 국민당의 기를 꺾고 이들이 서방 국가에 지원 요청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되도록 건국 기념행사를 앞당기는 것이 좋겠다는 스탈린의 의견을 수용하여 그 시기를 1949년 10월 1일로 앞당겼다.
천안문 망루 위의 마오쩌동, 1949년 10월 1일
‘신중국’은 중공이 목표로 했던 사회주의 국가체제가 아닌 전시체제하에서 민주 당파 등 각 정당 및 지구, 인민 단체 등과 연합한 ‘신민주주의’ 통일전선 정부로 출범했다.
‘전시체제’라 함은 당시까지도 광시 군벌 바이충시(白崇禧)와 광동 군벌 위한모(余漢謨)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당 잔여 세력이 후난성 남부와 광동, 광시 등 중남 및 화남 지구에서 저항하고 있었고, 또한 후종난과 쏭시롄(宋希濂) 집단군을 주력군으로 하는 세력이 쓰촨, 윈난, 시캉(西康), 구이저우(貴州), 시장(西藏: 티베트) 지구 등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기념식은 1949년 10월 1일 오후 3시 베이징 톈안문 성루(城樓)에서 광장에 모인 약 30만 명의 군중과 함께 거행되었다. 바로 1시간 전인 오후 2시에 중난하이 근정전(勤政殿)에서 개최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중앙인민정부 비서장으로 선출된 린보취(林伯渠, 1886~1960년)가 개회를 선포한 후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 마오쩌동이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오늘 성립되었다. 중국 인민이 일어섰다”라고 선포했고, “인민공화국 만세”와 “마오 주석 만세” 등의 환호 소리 속에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 바탕에 공산당을 상징하는 큰 별과 그 별을 둘러싼 노동자(工), 농민(農), 지식인(士), 민족 자산계급(商)을 의미하는 네 개의 작은 별이 노란색으로 그려진 오성홍기(五星紅旗)가 게양되고 국가로 지정된 「의용행진곡」이 연주되고 28발의 예포가 터졌다.
예포 28발은 1921년 7월에 상하이에서 개최된 중공 제1차 전국대회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당된 후 이날까지 28년의 기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천안문 위의 마오쩌동,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당시 명목상 최고 정치권력 기구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였다. 이 기구는 중공과 각 민주당파, 인민단체, 인민해방군, 지역, 민족, 해외 화교 등 각 분야 대표 65명으로 조직하고 1949년 9월 29일에 베이징에서 1차 회의를 개최했다. 1차 회의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정치적 토대는 (사회주의가 아닌) ‘신민주주의’, 즉 ‘인민민주주의’라는 점을 만장일치로 합의하고,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이하 ‘공동강령’)을 통과시켰다. ‘공동강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는 ‘신민주주의’ 즉 인민민주주의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정치적 토대라는 점에 만장일치로 합의한다.
…… 노동자계급이 지도하고 노농연맹을 토대로 각 민주적 계급과 국내 각 민족의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실행한다.
신생 정권의 기본 이념과 정책은 마오쩌동이 제기한 ‘신민주주의론’과 ‘연합정부론’을 주축으로 했다. ‘공동강령’ 전문에, “인민정치협상회의는 ‘신민주주의’를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기초로 삼을 것에 일치 동의한다”라는 것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독립, 민주, 평화, 통일 및 부강(富强)을 목표로 분투하고, 농업국을 공업국으로 변모시킨다”라고 명시했다.
‘공동강령’은 경제제도에 대해서, “공적 소유와 사적 소유의 병행, 노동과 자본의 공동 이익, 도시와 농촌의 상호부조, 국내와 국외의 교류”라는 원칙을 제시했다. ‘사적 소유’와 ‘자본과의 공동 이익’을 명시한 ‘원칙’에서 알 수 있듯이 ‘공동강령’에 사회주의는 포함되지 않았다.
베이징 접수후 행진하는 중공 인민해방군
그 이전에 개최된 중공중앙 회의에서 일부 참석자들이 공동강령에 ‘사회주의’ 전망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했으나 그에 대해 마오쩌동은 이렇게 말했다.
"이는 조급증이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은 15~16년이 걸렸다. 1932년에야 비로소 정식으로 사회주의를 시행했다. 중국에 사회주의는 아직 이르다."
향산에서 난징 점령 소식 신문을 보고 있는 마오쩌동
그러나 마오는 그 말을 한 후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서 스스로 ‘조급증’을 드러낸다. 즉 합작화, 대약진, 인민공사 운동 등 극좌 노선을 조급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처절하게 실패한다.
이 ‘신민주주의’ 노선이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노선으로 부활된 것은 마오쩌동이 죽은 후 덩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을 잡고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부터라 하겠다.
이후 ‘공동강령’이 헌법의 역할을 했으나, 1954년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정 시에 정치협상회의 성격을 유사 권력 기구에서 자문 기구로 바꾸고 민주 당파는 명목상으로만 최고 권력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에 배치했다. 또한 국민당정부하의 정무원(政務院)이 국무원(國務院)으로 대체됐으나 국무원 총리나 부총리 가운데 민주 당파는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대해 민주 당파의 불만이 없을 수 없었고, 이것이 훗날 ‘우파 운동’과 그에 대한 중공의 ‘반우파 투쟁’의 원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