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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Oct 24. 2023

중국공산당 창당

박인성의 중국현대사(1)



중국공산당 창당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은 1921년 7월 23~31일에 개최된  ‘중공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창당되었다. 창당 과정에서 특기할 점은, 소련공산당(苏共)의 하부 조직인 코민테른, 즉, 공산국제(共产国际, Communist International)의 지도와 지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 성공 이후 소련공산당은 중국 등 아시아 지역의 창당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1920년 극동 시베리아에 코민테른 극동서기처를 설치했다. 이 기구는 중국 광저우에 황푸(黄埔)군관학교 설립을 돕고 쑨원(孫文)이 창당한 국민당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고문단 파견과 무기 제공 등의 지원을 했다. 또한, 모스크바에 정치 간부를 양성하는 대학을 설립하고 그 이름을 쑨원의 호를 따 중산(中山)대학이라고 정했다. 쑨원의 후계자인 장제스(蔣介石)도 원래는 (1927년 4·12 반공쿠데타 발동 이전에는)  자신의 아들 장징궈(蔣經國)를 모스크바 중산대학으로 유학 보낼 정도로 소련공산당과의 협력을 중시했었다.


1919년 5·4운동 직후 코민테른 극동서기처 책임자 수밀츠키(Sumiltsky)와 부책임자 보이틴스키(Grigori Voitinsky)가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중국인 좌파 지식인 천두쇼우(陳獨秀) 등과 함께 중국공산당 건설을 추진했다. 수밀츠키가 1921년 6월 극동서기처 중국 지부를 설립하자는 계획서를 코민테른에 제출했고, 같은 해 7월 23일 극동서기처 소속 니콜스키(Nikolsky)와 마링(Maring)의 지원을 받아 상하이와 저장성 자싱(嘉興)에서 창당대회인 ‘중공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1921년 7월 23~31일에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열렸는데, 니콜스키와 마링이 코민테른 대표로 참석해 축사를 했다. 단, 대회 개최 시기에 대해 확신할 만한 근거 자료는 없다. 소수 회의 참가자의 기억과 관련 자료 등에 근거해 추정하고 있을뿐이다.


창당대회는 상하이 시내의 프랑스 조계지에 자리한 사립 여학교인 보원여교(博文女校) 교정 안의 한 건물에서 시작했으나, 회의 도중에 국민당 밀정들의 움직임을 탐지하고, 급히 장소를 바꿔서 상하이에서 서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자싱(嘉興)의 난후(南湖)호수로 이동한 후에 호수에 띄운 배 안에서 회의를 계속 진행했다.


중공 제1차 전국대표대회 장소, 상하이


중공 제1차 전국대표대회 장소, 자싱(嘉兴), 난후(南湖)


중공 제1차전국대표대회 대표, 참석자


회의 참석자는 후난성(湖南省) 대표 마오쩌동(毛澤東)을 비롯해 베이징, 상하이,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 후난성 창사(長沙), 산동성 지난(濟南), 광동성 광저우(廣州) 등지에서 온 지역대표 모두 13명이었다. 당시 중국 전국의 공산당 당원 수는 모두 50여 명에 불과했고, 당원 대부분은 신해혁명(1911년)과 5·4 운동(1919년)에 참여했거나 러시아의 10월혁명(1917년) 성공 이후 중국 내에 확산되고 있던 사회주의사상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들이었다.


https://youtu.be/FvDBlx1H7yE


1921년 7월 창당대회에서는 당의 기본 임무와 조직 원칙, 당 지도 기관 등에 대해 토론하고 결정했다. 그들은 당 강령에 “노동자계급 혁명 군대로서 자본가계급을 타도해 계급 구분과 자본가의 사유제를 없애고 공장 등 생산수단을 몰수해 사회 공유로 귀속시키고, 당의 최종 투쟁 목표는 노동자계급의 폭력혁명을 통한 공산주의국가 건설이다”라고 명기했다. 이와 함께 당의 중앙지도기관인 중앙국이 당의 모든 사업을 책임지도록 결정하고, 천두쇼우를 중앙국 서기로 임명했다.


중공은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코민테른이 모스크바에서 개최한 극동 각국 공산당 및 민족혁명단체 제1차 대표대회에 14명의 대표를 파견했다. 이 회의에서 레닌(Vladimir Il’Ich Lenin)은 중국 노동자계급은 기타 혁명 역량과 단결해 중국혁명을 전진시키라고 독려했다.


창당 후 상당 기간 동안, 중공 중앙의 지휘를 소련 유학파들이 주도했고, 혁명 추진 전략의 중점을 도시 노동자계급에 두고, 상하이, 우한, 텐진 등에서 노조 중심의 파업과 도시노동자 중심의 운동에 중점을 두었으나 좌절과 실패를 거듭하게 되자, 중공 중앙의 방침이 점차 마오쩌동이 실천하며 제안한 농촌 근거지를 구축하고, 혁명 동력 확보를 위해서 전략 중점을 도시·노동자에서 농촌·농민으로 옮기고, 유격 전술을 기초로 하는 토지혁명전쟁을  통해서 농촌이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으로 전환되었다.


이 같은 전략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그 효과가 갈수록 강력해지자 국민당 장제스가 다섯차례에 걸친 공비 포위토벌 공격을 했고, 결국 제 5차 공세에 패한 중공 중앙 홍군이 패배하고 퇴각하면서 1년여간 험악한 산간오지 지구를 쫒기며 이동했다. 이 고난의 퇴각 행군 과정을 ‘장정(長征)’이라 부른다.


그러나 장정 끝에 도착한 중국 서북부 지구에서 시안 사변 발발로 항일전쟁을 위한 국공합작 통일전선이 구축되자, 중공은 이 시기를 이용하여 대폭 힘과 세력을 확충했다. 그 결과 일제가 패망하고 물러간 후에 벌어진 (중공은 해방전쟁이라 부르는) 제2차 국공내전에서는 중공 인민해방군이 승리하여 국민당 세력을 타이완섬으로 몰아내고, 1949년 10월 1일에 '사회주의 신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상하이 조계지에서 초라할 정도로 작은 규모로 창당, 출범한 중국공산당이 1921년 7월 이후 불과 28년 만에 중국 대륙의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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