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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모 Nov 29. 2022

이브의 다이어트

내일부터 할 겁니다

결혼 후 남편과 맞이한 첫 크리스마스는 황홀 그 자체였다. 

새해 첫 달 눈이 맞은 우리는 2월부터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아홉 달 만에 부부가 되었다. 짧았던 우리의 연애 기간 중 12월은 없었으니, 달달 야릇한 크리스마스의 추억도 있을 리 없다. 

신혼 시절, 우리는 차로 3시간 거리를 오가는 주말부부였다. 함께 주말을 보내고 헤어지는 일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눈물 콧물을 빼며(지금 생각해 보면 나만 그랬던 것 같다.) 멜로 영화를 찍었다. 

그랬으니 우리의 첫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기다려지고 아름다웠겠는가. 그해 크리스마스는 때마침 금요일이었고, 우리는 3일 동안 아담과 이브가 되었다. 내 인생에 가장 어른스럽고 달콤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날을 즐긴 이브에게 가혹한 벌이 내려질 거라는 사실을. 


일에 찌들어 있던 어느 날, 감기가 오는지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점심 메뉴를 보자마자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결혼한 선배가 팔목을 잡으며 “너, 혹시? 약 먹지 마.”라고 했다. 정신이 확 들고 체기가 내려갔다. 임신이었다. 아담이 준 크리스마스 선물이구나 생각하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감기약 대신 임테기를 사 들고 퇴근했다. 선명한 두 줄 소식을 남편에게 삐삐 암호로 알렸다. 

5782(급한 호출) 222(이세) 100003(만세) 0404(영원히 사랑해) 1004(천사로부터). 


별을 따서 담았으니 아기의 태명은 별, 그렇게 나는 별이 엄마가 됐다. 산모 수첩을 받고 나니 실감이 났다. 

그러나 잉태의 기쁨은 잠시,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졌다. 별이가 자궁 밖 나팔관에서 위태롭게 버티는 중이라고 했다. 자궁외 임신이었다. 종교는 없지만 날마다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했다. 

수술 날짜를 잡으러 병원에 가던 날, 의사 선생님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별이가 힘을 내어 자궁까지 안전하게 내려왔단다.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고 내 안에 숨어있던 모성애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무조건 잘 먹고 튼튼한 아기를 낳자고 다짐했다. 안 마시면 죽을 것 같은 봉지 커피를 딱 끊었다. 싫어하는 우유도 시간 맞춰 한 사발씩 들이켰다. 잠깐의 입덧 기간을 빼고는 가리지 않고 뭐든 잘 먹었다. 심지어 피자 한 판을 해치울 때도 있었다. 아기가 커 가는지 살이 찌는지 모르게 배는 이쁘게 불러갔다. 남편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비싼 임부복을 선물했다. 배 둘레를 쉽게 짐작할 수 없는 마법의 빨간 원피스였다. 출산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체중계에 올라가던 날, 두 눈을 의심했다. 무려 20kg나 불어있었다. 처음 겪는 출산의 공포보다 더 무서웠다. 

성격 좋은 의사 선생님은 애 낳고 산후조리 잘하면 서서히 빠질 거라고 했다. 믿고 싶었다. 아니 믿어야 했다.




결혼도 속전속결이더니 뭐가 그리 급하다고 금방 둘째까지 뚝딱 만들어냈다. 말이 두 살 터울이지 연년생이나 다름없었다. 초보티를 팍팍 내며 계획에 없던 육아 전쟁을 용감하게 시작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작은 도시에서 순전히 책으로 두 딸을 키웠다. 일도 잘하고 별이 달이도(아, 둘째의 태명은 달이다.) 잘 키우고 싶었다. 완벽하고픈 욕심에 앞만 보고 내달렸다. 이브는 서서히 소멸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울 속 낯선 여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줌마 누구세요? 후덕한 몸매의 중년 여자는 추노처럼 산발한 채로 말없이 체중계를 건넸다. 말 잘 듣는 나는 냉큼 저울 위로 올라섰다. 덜덜 떨며 한참을 헤매던 체중계는 힘겹게 집계를 마치고 점수를 내놓았다. 

마치 “손님, 이런 무게는 처음입니다. 고장 나기 전에 어서 내려오세요.” 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지만, 얼굴이 후끈거렸다.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는 말은 다 거짓이었다. 몸 푼 지 어언 20년도 넘었다. 아이 하나 출산할 때마다 공식처럼 10kg씩 늘어났다. ‘두 번 출산했어요.’ 체중계는 수학의 신이었다. 몸무게를 자각한 순간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추웠다 더웠다 요란을 떨더니 24년 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새댁처럼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굶어도 마법처럼 쑥쑥 커지는 몸을 보고서 그제야 눈치를 챘다. 쾌락을 즐긴 이브에게 내려진 가혹한 벌은 20kg짜리 살덩이라는 것을. 온몸에 덕지덕지 붙이고 살다 중년 즈음에 비참하게 발견하라는 자비 없는 벌이었다. 좀 억울하다 싶지만, 따지고 들 힘이 없었다. 지난 죄를 인정하고 나니 무기력이 찾아왔다.




살덩이와 바꾼 달과 별은 어느새 아가씨가 되었다.  

‘쳇, 저것들 다 내가 만들어 준 건데.’ 내 앞에서 팔랑팔랑 나풀거릴 때마다 이쁜 질투가 났다. 무기력에 질투가 더해지면 먹부림이 생긴다. 치킨 한 마리는 거뜬히 해치우고 김치에 밥만 있어도 꿀맛이다. 내가 한 밥, 남이 한 밥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그 덕에 후덕해지고 몸무게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뭐든 많으면 장땡이지, 아직 몸에 맞는 옷이 널렸는데 뭘. 아, 몰라 몰라,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다이어트 못해. 

죄를 사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나에게 남편은 말했다.

“그러다 아프면 죽어.”

“그럼 새장가가시던가.”

정말 이상하게도 죄를 사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TV에서 다이어트 정보를 공짜로 흘리고 쇼호스트는 살과 죄를 한꺼번에 덜어낼 수 있는 마법의 약을 보여줬다. 오래전 불혹을 거뜬히 넘긴 나는 유혹도 쉽게 넘겼다. 

하지만 뭔가 찝찝하고 불안했다. 답답한 마음에 집 근처 공원으로 나가 무작정 걸었다. 

‘야가 앉으니 침대가 푹 꺼지네.’ 하시며 웃던 시어머니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정말 뜬금없었다. 20년 넘게 꿋꿋했는데 뒤늦은 창피함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 지금이야, 지금부터 죗값을 치르자. 마음이라도 가벼워지겠지 뭐. 그날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내 인생 첫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다이어트는 생각보다 쉬웠다. 한 시간씩 걷고 저녁에 풀떼기 좀 먹어줬더니 금방 티가 났다. 3개월 만에 첫 출산의 흔적을 걷어냈다. 완벽하게 한 사이즈를 줄였다. 흥분한 나머지 쓸데없이 과감해져서는 입던 옷을 내다 버리고 옷가게로 달려갔다. 입어보는 족족 몸이 쏙 들어가니 신나서 막 질러댔다. 못 입던 쫄티와 스키니진도 샀다. 내 몸뚱이 주인은 난데 남편이 덩달아 좋아하고 난리였다. 설마 오래전 그날처럼 별 보러 가자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간 그 두 눈에 별이 번쩍일 것이야. 


내가 그려놓은 중년의 이미지에 ‘날씬’은 없다. 이쯤이면 되었으니 이대로 유지어터가 되기로 했다. 요요라는 놈을 만나본 적 없는 초보 다이어터의 겁 없는 선택이었다. 줄어든 몸은 1년 가까이 잘 유지되고 있었다. 성공했다는 안도감에 슬슬 고삐를 풀기 시작했다. 커피 한 잔쯤은 괜찮겠지.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저녁 한 끼 정도는 괜찮아. 한 번 터진 입은 자제력을 잃고 쉽게 열렸다. 하루에 2kg쯤 올리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요요는 달콤 살벌하게 내 몸에 살덩이 붙여 순식간에 넉넉한 중년으로 되돌려 놓았다. 무서운 놈.

"엄마, 이쁘고 고상하게 늙고 싶다며. 안돼, 참아!"

요요는 감시자까지 남겨두고 떠났다.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뜨면 사정없이 짖어댄다. 에잇, 더러워서 다시 다이어트한다. 내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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