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수 없이 바뀌던 어릴 적 꿈 중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유일한 꿈은 ‘어른’이었다. 선생님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닌 어른 사람이 그토록 멋져 보였다. 어른의 자유가 부러운 건 아니었다. 어른처럼 커 보이고 싶고, 어른처럼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른스럽게 굴었다.
“큰딸 맞지?”
친구들은 내가 둘째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속 깊은 고민을 털어놓고 어른의 답처럼 나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아이고, 손끝 야무진 거 보소. 딱 맏며느리감이네!”
여사님들은 갓 스물 된 아가씨에게 선 자리를 들이밀었다. 어른스럽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내 이름 앞에 붙었다. 조신한 나의 뒤태에 침을 흘리던(남편은 너의 착각이라 말한다.) 총각들은 죄다 큰아들이었다. 사주에 등장하는 남편 자리는 보통 열 살을 훌쩍 넘긴 연상이었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바라던 어른의 모습이었으니까.
“바쁜 일 있어요?”
“아뇨, 없어요.”
“그래요? 그럼 결혼합시다.”
노총각 상사가 느닷없는 청혼을 했다. 무례했다. 내 나이 스물넷, 외모에 물이 오르는 중이라 도도하게 굴기로 했다. 장미 백 송이를 들고 와 무릎을 꿇던 놈이 있었고, 늦은 밤 찾아와 사귀자고 울던 놈도 있었다. 일하는 모습에 반해 아들을 주겠다는 시어머니 자리도 있었고, 의사 공부 중인 동생을 가지라며 제수씨 자리를 비워 둔 직장 상사도 있었다. 경찰, 교사, 선 자리가 넘쳐났다. 한 놈 잘 골라 평생 편하게 놀고먹을 참인데 복병이 생겼다.
서른둘 노총각(90년대는 그랬다.)은 밀당의 고수였다. 낚싯대를 훅 던져놓고 줄을 감았다 풀었다 가만가만히 애간장을 녹였다. 자세히 보니 외모도 남달랐다. 180cm 장신에 수트발이 끝내주는 세련된 남자였다.
진한 쌍꺼풀 눈에 올려진 뿔테 안경은 지성미를 뿜어냈고, 팔을 움직일 때마다 하얀 소매 깃을 곱게 여민 커프스 버튼이 반짝였다. 읍내(우리 동네는 아담한 시골 읍내였다.)서 보기 힘든 품격 있는 남자 어른이었다.
외모에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눈을 딱 감고 첫사랑을 떠올리며 버텼다. 하지만 3일 만에 KO패 당했다.
생각보다 언변이 뛰어난 늑대였다. 이 남자랑 살면 바라던 진짜 어른의 모습이 완성될 것 같았다. 그렇게 여덟 살 차이 나는 어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연인이 되었다.
아들의 연애를 손꼽아 기다리던 시부모님은 예비 며느리를 버선발로 맞으셨다. 내 나이를 듣고 어머님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스물일곱으로 하자.”
딱 세 살만 더 붙여서 친척들에게 소개하자고 수를 내셨다. 감히 ‘아니오.’라고 할 수 없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조숙한 나의 외모 덕에 어머님의 거짓말은 한 방에 먹혔다. 나는 세 그릇의 떡국과 3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더 큰 어른이 되었다.
결혼이 시급한 노총각은 뭐든 빨랐다. 손도 빨리 잡더니 같이 살 집도 빨리 구했다. 온통 정신을 흩트려놓더니 결혼식장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어른의 결단력이었다. 손잡으면 결혼해야 하는 줄 알았던 바보 어른은 얼떨결에 결혼을 했다. 결혼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