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접어들었다. 날이 풀리고, 햇살의 기운을 받은 어린싹이 힘을 내기 시작했다. 그 덕에 지루했던 겨울의 흔적은 사라지고 어느새 찬란한 연둣빛 세상이다. 나에게 봄은 꽃보다 ‘연둣빛 싱그러움’이다. 어느 틈이든 비집고 나와 새봄을 물들이는 여리지만 강인한 그 빛깔이 좋다. ‘처음의 설렘’이 좋은 이유도 연둣빛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여보, 선암매가 피었대!”
남편의 봄은 매화꽃으로 시작된다. 선암사 각황전 담길에 핀 홍매화 소식을 전하는 목소리가 새싹처럼 보드랍다. ‘여성호르몬 과다분비’로 인한 싫지 않은 변화다.
작년 봄, 선암사 홍매화 구경을 시작으로 틈만 나면 둘이서 손을 잡고 싸돌아다녔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런 건 아니다. 삶에 대한 재정비가 필요했다. 우리는 잉꼬부부다. 싸우며 살지만 단 한 번도 결혼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25년 전의 콩깍지가 아직 벗겨지지 않았고, 우리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제법 많으니 자타공인 잉꼬부부다. 그런 우리가 지난봄 방황했던 이유는 시아버지 때문이었다.
2021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열흘 앞두고 아버지는 사고를 당했다. 전지 작업을 하던 중 발을 헛디뎌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하필 머리를 다쳤다. 건강하던 아버지는 그 길로 구급차에 실려 가 하루아침에 중환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착각과 망상에 시달리며 심한 헛소리와 잠꼬대를 했다. 말로만 듣던 ‘섬망’이었다. 깨어나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휠체어를 타게 될지도 모른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 겨울은 말할 수 없이 매서웠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라 병원을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했다. 아버지를 곁에서 지킬 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은 애잔했다. 아주버님은 생업을 포기하다시피 했고, 남편은 휴가를 써 가며 번갈아 병상을 지켰다. 며느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남편의 당번 날에 밑반찬을 해 보내고, 혼자 계시는 어머니께 자주 전화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식구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까? 해가 바뀌고 기적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일어나 걸었고, 자식들을 알아봤다. “아부지, 나 누구예요?” 큰 놈, 작은놈 돌아가며 물어도 싫은 내색 없이 웃었다. 당신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가고 싶어!” 하고 아이처럼 말했다. 어머니와 5남매의 정성이 기적을 불렀고, 일생을 성실히 살아온 당신에게 내려진 ‘하늘의 복’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집으로 돌아와 설 명절을 맞았다. 나는 그 설에 시가에 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상 안 차릴란다.” 어머니는 종갓집 종부로 평생 해 온 일에 스스로 태클을 걸었다. 말 잘 듣는 며느리는 오지 말라는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대신 남편을 명절선물로 보냈다. 결혼 24년 만에 처음 맞는 휴가였지만 맘 편히 친정에 갈 수 없는 이상한 명절이었다.
설이 지나고 다시 일상, 아버지를 뵈러 갔다. 아버지는 막내 시누가 선물한 비니를 쓰고 우리를 반겼다. 인생 첫 비니가 제법 잘 어울려 ‘세련된 시골 아저씨’ 같았다. 대통령 선거일에도, 병원 가는 날에도 아버지는 비니를 썼다. ‘아부지, 이제 고단한 농사일 그만하시고 이렇게 이쁜 모자 쓰고 같이 놀러 다녀요.’ 나는 속으로 말했다.
암담하던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틈날 때마다 아버지와 함께 외출했다. 산수유꽃밭에서 사진을 찍고, 벚꽃 잎 날리는 강변을 드라이브했다. 장미 축제에 가서 맛없고 비싼 복분자 주스도 마시고, 절에 가서 기왓장에 식구들 이름을 쓰고 소원도 빌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참게탕도 사 먹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채식 뷔페에도 갔다.
“오메, 좋다! 나는 인자 일 안 하고 맛난 거 사 먹으면서 놀러 다닐란다.”
어머니는 코로나 확진이 되던 날에도 좋아서 웃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웃음은 그리 환하지 않았다.
농번기에도 아버지는 논밭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것은 직업을 잃는 고통이었고, 갑작스러운 은퇴와 같았다. 사고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지했을 때, 아버지의 눈동자는 흔들렸다. 그러다 불안과 우울을 보이기 시작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였다.
아버지는 오로지 당신의 아내에게만 의지했다. 종잡을 수 없는 감정 변화에 그 곁을 지키던 어머니도 의연함을 잊어갔다. 감당하기 벅찬 날들이 계속되자 두 분은 자주 충돌했다. 노부부의 애증을 바라보는 자식들 가슴도 무척 아렸다.
그 봄, 남편과 나는 갱춘기를 앓고 있었다. 삐딱함이 고개를 들 때마다 집 밖으로 나가 기꺼이 방황하자고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시가로 여행 아닌 여행을 갔다. 속단일지 모르지만,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조급했다. 왕복 4시간 거리를 오가다 가끔 차를 세웠다. 꽃을 보면 말을 걸고, 물을 보면 하소연하며 시끄러운 속을 비워냈다. 시가에 가지 않는 날에는 산을 오르고 바다를 보러 갔다. 감성(F)적이고 계획적인(J)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를 통해 중년의 삶을 정비해 갔다. 더 잘살아 내고픈 욕망이 컸다.
추석에는 두 분에게 ‘색다른 명절’을 선물하고 싶었다.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려니 은근히 신경 쓸 게 많았다. 미리 식단을 짜고, 장 봐 온 재료들을 손질해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며칠 전부터 이불 빨래를 하고, 대청소도 했다. 구경하기 좋은 곳을 물색하느라 머리에 쥐가 났다. 그러느라 여러 날 분주하고 고단했어도 기뻤다.
차례상을 걷고 시골집 대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친척들이 왔다가 황당해해도 모를 일이다. ‘종손 부부’를 탈출시키는 게 목적이었으니 누군가 오기 전에 서둘러 떠나야 했다. “나는 배를 타도 그렇고 차를 타도 멀미를 안 해!” 아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의 기분 좋은 수다는 멈출 줄 몰랐다. 60년 시집살이 중 명절에 집 나온 경험은 처음일 테니 어머니의 흥분은 당연한 거였다.
어머니 아버지가 아들 집을 처음 온 것처럼 구경했다. 너무 구석구석 들여다보면 점수 깎일까 봐 “아부지, 점심 먹고 좋은데 구경 가요!” 하고 얼른 밥상을 차렸다. 밥 먹고 우리는 또 집을 나왔다. 유달산 조각공원에도 가고, 세월호가 있는 고하도에도 갔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밥값보다 비싼 커피를 마셨다.
밤에는 춤추는 바다 분수를 감상하고, 팡팡 터지는 해상 불꽃쇼를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오메, 오메. 내 생전 처음이네!” 어머니가 손을 뻗어 쏟아져 내리는 불꽃을 받아내는 시늉을 했다. 외국보다 더 좋다고 했다. 어머니는 인생 첫 동영상으로 ‘폭죽 쇼’를 휴대폰에 저장했다. 모실떡(이웃, 모실댁)한테 자랑할 거라고 했다. 아버지도 “좋다! 좋아!”하시며 활짝 웃었다. 이럴 땐 사진을 백 만장쯤 남겨두는 게 ‘국룰’이라 나는 휴대폰만 쳐다보고 웃었다.
다시 봄, 새순이 돋고, 꽃이 피기 시작했다. 남편이 매화 소식을 전했지만 우리는 작년처럼 손을 잡고 선암사에 가지 않았다. 개나리가 흐드러지고, 벚꽃이 꽃망울을 터트렸어도 아직 아버지와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겨울을 지나는 동안 아버지의 기력이 많이 약해졌다. 지난 주말에 뵈었을 때는 계속 주무시기만 했다.
“아부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그러자, 내가 사마.” 하시던 아버지는 외출의 기쁨도, 자식과 함께 하는 재미도 잃어버린 것 같다.
올봄도 어김없이 어머니의 호미 끝에서 시작되었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가장이 되어버린 어머니는 가슴이 들끓고 눈물이 날 때마다 호미를 들었다. 논두렁 밭두렁을 ‘캉캉’ 찍어대면 한숨이 덜어진다고 했다. 호미질 몇 번으로 그 속이 다 비워질 리 없지만, 작은 호미 한 자루라도 어머니 곁에 있으니 참 다행이다.
호미 끝으로 찍어낸 한숨은 냉이, 달래, 숙지, 머윗잎으로 올라와 풍성하다. 바지런한 어머니 손끝에서 국이 되고 나물이 되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고기 한 점 없이도 걸진, 보약 같은 밥상이다. 입맛 없다던 아버지는 아내의 푸성귀 밥상을 받고 아들, 며느리보다 밥을 더 많이 드셨다. ‘다행이다, 잘 드셔주셔서.’
쌍계사에 벚꽃 보러 가야 한다. 작년 봄, 꽃구경 나온 인파로 길이 막혀 못 보고 돌아왔다. 어머니도 나도 아쉬워했다. 꽃피면 다시 가기로 했는데 아버지는 밥을 잘 드시고도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다. 돌아누워서 또 주무신다.
“힘든 농사일 그만하세요. 이제 그럴 때가 됐어요.” 이 말이 몹시도 서운했던 모양이다. 희망 없어 보이는 눈빛과 다정함이 사라져 버린 아버지의 모습은 풀리지 않는 겨울 같다. 지금 아버지의 계절은 어디쯤일까? 밭을 갈아 이랑을 만들고, 씨 뿌릴 준비로 분주했던 지난봄의 씩씩했던 아버지가 그립다.
우리는 아버지의 봄을 몇 번 더 만날 수 있을까?